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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 귀족’의 사회주의, 들어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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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 귀족’의 사회주의, 들어보셨습니까

입력
2018.01.11 17:35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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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왼쪽), 비어트리스 웹 부부. 복지국가 영국을 만들어낸 것은 이 부부의 공이 크다. 아카넷 제공
시드니(왼쪽), 비어트리스 웹 부부. 복지국가 영국을 만들어낸 것은 이 부부의 공이 크다. 아카넷 제공

복지국가의 탄생

박홍규 지음

아카넷 발행・293쪽・1만2,800원

비어트리스 웹(1858~1943), 그리고 시드니 웹(1859~1947) 부부의 일대기를 뼈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 알려진 복지국가 영국의 탄생 문제를 다룬 책이다. 이 책의 가치는 저자가 서문에서 풀어놓았듯, 딱 꼬집어 두 가지를 꼽을 수 있겠다.

첫째, “이 책은 웹 부부에 대한 한국어 논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맞다. 없어도 너무 없다. 혁명과 거리를 둔 채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우익 상류층’에 대한 얘기 말이다. 왜 그럴까.

우선 우리 같은 세계 주변부 사람들이 보기에 이들에겐 혁명의 아우라가 없다. 한마디로 폼이 안 난다. 또 너무 치켜세웠다간 “우리의 투쟁으로 쟁취해냈다”는 좌파의 공로가 침범 당할 수 있다. 약점도 있다. 우익 상류층은 당대 세계의, 제국의 중심부에서 활동한 이들이다. 이들은 성자(聖子)가 아니다. 당연히 엘리트주의와 제국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웹 부부를 두고 “다른 정치적 맥락에서 보자면 제국주의, 대기업, 정부행정, 그리고 정치적 우익에 속한다”고 평했다. 오랜 기간 교류했던 자유주의 지식인 버틀란드 러셀 또한 웹 부부의 종교, 제국주의, 국가 숭배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100% 옳지 않으면 다 비판하는 좌파, 당혹스러웠을 우파 모두 외면하고 싶은 부분이었을 게다.

다른 가치 하나. “특히 그들은 민중이니 인민이니, 사회주의니 사회주의 정당이니, 유물론이니 계급투쟁이니 하는 실체 없는 환상에 매달리지 않고” 그 덕에 “섣불리 ‘노동’이니 ‘사회주의’니 하여 다수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잘리기도 전에 고사한 경우”와 달랐다. 실제 영국 노동당의 경우 출범 초기엔 ‘사회주의’ 혹은 ‘정당’이라는 단어를 극구 회피했다. 오랜 계급사회의 영향으로 노동자가 당을 만들어 정치를 한다는 것, 심지어 그 정치가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에 대해 노동자들 스스로가 불편하게 여긴다는 이유에서다. 서구의 급진적이며 현란한 용어들을 직수입해와서는 ‘계급배반투표’ 운운 을러대는 한국 풍경과 다르다.

그래서 웹 부부가 ‘사회주의자’라 해서 깜짝 놀랄 필요 없다. 웹 부부의 사회주의는 “선험주의에 입각한 공론가, 호언장담하는 사람들, 마르크스주의의 열광적 전도사이자 신봉자”와 무관하다. 되레 “노동당을 위해서라도 (우리의)사회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라는 굳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진보를 자임하는 이들이 거듭 되씹어볼 문장이다. 동시에 저자가 지금 이 시점에서 웹 부부를 다시 불러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르크스 유일만능주의”가 깨지고 웹 부부의 “철저한 경험주의와 실증주의”가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저술 작업을 함께 하고 있는 웹 부부. 남편 시드니 웹은 자신들의 결혼을 두고 "1 더하기 1은 11이 된다"고 표현했다. 아카넷 제공
저술 작업을 함께 하고 있는 웹 부부. 남편 시드니 웹은 자신들의 결혼을 두고 "1 더하기 1은 11이 된다"고 표현했다. 아카넷 제공

책엔 여러 매듭이 있다.

우선 웹 부부의 삶. ‘경이’ 그 자체다. 비어트리스는 요즘으로 치자면 재벌가 공주님이었으나, 사회개혁에 대한 열망을 안고 중하류 집안 출신 공무원이자 사회주의자인 시드니와 결혼을 감행한다. 조지 버나드 쇼와 함께 페이비언협회 핵심 멤버였던 시드니의 글 한 편에 반해서다. 비어트리스가 미쳤다는 둥, 쓰레기통에서 남자 하나 주워 결혼했다는 둥 온갖 소문이 나돌았으나 이들 부부는 런던 빈민굴에 아파트를 얻어 살면서 아이도 낳지 않은 채 남은 삶의 50여년을 사회주의 연구, 토론, 전파에 바쳤다. 시드니는 이 결혼을 두고 “1 더하기 1은 11이 된다”고 표현했다.

사회조사기법도 매듭 중 하나다. 노동계급의 참상에 대한 대책 마련이 촉구되자 실태 조사를 벌였다. 1885년 좌파들은 런던 노동자계급의 25%가 극빈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 비어트리스의 고종 사촌 형부이자 부유한 자본가였던 찰스 부스는 이 주장을 좌파의 선전선동, 가짜뉴스라 반박하면서 자신이 직접 조사하겠다 나선다. 요즘 말로 팩트체커다. 28살이었던 비어트리스까지 참여시킨 조사 결과 극빈층은 오히려 30%가 넘는 것으로 나왔다. 부스는 어떻게 했을까. 이 결과를 있는 그대로 공개했을 뿐 아니라 추가 조사까지 했다.

런던정치경제대학(LSE) 설립도 주요 대목이다. 페이비언협회 회원이 협회에다 유산을 남기자 이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논란이 일었다. 웹 부부는 런던정치경제대학을 세웠다. 그 때문에 이 대학은 ‘웹의 집(WEbberies)’라고도 불렸으나, 의도적으로 사회주의 성향의 연구를 진행하진 않았다. 교수 중엔 사회주의와 무관하거나, 아예 대놓고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이념이 뭐든 간에 일단 사회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해보자는 의미다. 그 덕분에 오히려 사회적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셔널 미니멈(National Minimum) 개념. 웹 부부가 오랜 연구 끝에 제시한 비전이다. 최저생계 보장, 최저휴식 보장, 최저위생 보장, 최저아동 보장, 4가지로 이뤄져 있다. 이 ‘내셔널 미니멈’ 개념이 우리 귀에도 익숙한 ‘베버리지 보고서’로 이어진다. 참고로 부유한 가문 출신인 베버리지 또한 평생 사회주의자였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이 매듭들이, 그러니까 ‘마르크스’, ‘혁명’, ‘빨갱이’와 무관한 이 매듭들이 기묘하게 얽혀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탄생했다. 저자는 “통치자인 귀족은 선정을 베풀어 백성의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전통”을 들면서 “보수당이라 해서 복지국가를 거부할 수 없다”고 했다. 최저임금, 노동시간 단축 등 우리에게 닥친 이슈도 많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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