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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닦음의 예술

입력
2018.01.10 15:2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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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중국 예술가와 희랍 예술가가 왕 앞에서 말다툼을 벌였다. 서로 자기 나라의 예술이 더 훌륭하다며! 두 사람의 다툼을 보다 못한 왕이 나서서 말했다. “그 문제를 논쟁으로 해결해 보자.”

중국인이 먼저 자기 나라 예술의 훌륭함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며 말했다. 희랍인은 입을 떼지 않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자 중국인이 제안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각자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누가 예술적으로 방을 꾸미는지 겨뤄보자고 했다. 희랍인도 이에 동의했다. 이윽고 두 방을 마주보게 하고 가운데를 휘장으로 막았다. 중국인은 왕에게 백 가지 물감을 청하여 아침마다 와서 벽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희랍인은 물감에 손을 대지 않았다. 자기는 그런 것으로 일하지 않는다며.

희랍인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벽을 닦아 광(光)을 내기 시작했다. 날마다 닦고 닦아 마침내 하늘처럼 순수하고 깨끗하게 만들었다. 오색(五色)에서 무색(無色)으로 가는 길이 바로 거기 있다는 듯! 중국인은 먼저 작업을 마치고 무척 행복해했다. 완성의 기쁨에 취해 북을 울리기까지 했다. 왕이 그의 방에 들어와서는 중국인이 그린 벽화를 보고 현란한 색깔과 세밀함에 감탄했다. 그러자 희랍인이 휘장을 확 걷었다. 중국인이 그려 놓은 온갖 형상이 그대로 희랍인이 닦고 또 닦아 광을 내놓은 벽에 비치는데, 빛에 따라 형상을 바꾸며 더욱 아름답게 살아났다. 왕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희랍인의 예술을 더 높이 치하했다.

12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잘랄루딘 루미(Rumi)의 시 ‘중국 예술과 희랍 예술’을 이해하기 쉽게 좀 풀어 보았다. 이 시는 매우 깊은 삶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몸 닦음’(修身)에 관해서 이처럼 명쾌한 그림으로 보여주는 글은 처음이다. 딱딱한 교설(敎說)이나 철학적 언술이 아닌 환한 언어의 그림으로.

일종의 그림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림 속에 영성의 첫 걸음을 어떻게 떼는가를 보여주는 또 다른 그림이 있다. 한 화가는 자기 내면의 오색(五色) 풍경을 벽에다 옮겨 놓는 데 반해, 다른 화가는 텅 비워진 자기 내면을 드러내듯 벽을 닦고 또 닦아 무색(無色)으로 만든다. 영성은 구름 걷힌 뒤의 순수하고 깨끗한 하늘처럼 무색투명으로 가는 길이라는 듯이.

여기서 ‘닦음’이란 우리말의 뿌리를 캐어보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보다 크고 높고 밝게 되는 일’이라고 한다. 요컨대 닦음이란 스스로를 고쳐 바로잡음으로써 새로운 나를 만드는 일로, 곧 주체적인 자아 혁명이라 할 수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적폐청산 작업이 진행 중이다. 적폐가 뭔가. ‘뿌리 깊은 악’이 아닌가. 이 뿌리 깊은 악을 청산하려면 우리 내면의 더께더께한 불순물을 닦아내든지 태워버려야 하리라. 단지 이전 정부의 몇 사람의 잘못을 들춰내고 단죄하는 것으로 뿌리 깊은 악은 사라지지 않는다. 희랍 화가처럼 우리 모두가 자기 내면의 벽이 무색투명해 지도록 닦고 또 닦아야 하리라.

화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얼마 전 그림과 관련된 해프닝이 있었다.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아이가 그린 그림에 인공기가 포함되었다고 시비를 거는 경조부박한 사람들. 그들의 마음에는 순진무구한 동심을 헤아리는 존재의 여백은 아예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여백이 없는 가슴에는 기득권에 안주하고 싶은 욕망만이 들끓고 있으리라.

루미의 이 시는 나 자신을 비춰볼 거울이다. 희랍인의 예술에 점화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갈망과 함께 아직도 숱한 욕망을 다 털어내지 못한 나 자신을. 해서 나는 누구를 비난할 마음이 없다. 다만 ‘처음으로 돌아가서 크고 높고 밝게 되는’ 닦음의 예술에 날마다 접속되려고 할 뿐.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은 맑고 향기로워진 나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니까.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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