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를 그다지 편안한 마음으로 보낼 수 없었다. 나라 안팎의 상황이 녹록찮아서다. 지난해 영화 ‘남한산성’도 개봉됐고 해서 내친 김에 최명길(崔鳴吉)의 문집 ‘지천집(遲川集)’을 정독했다.
마음은 더욱 불편했다. 당시 당쟁 상황과 지금의 보수ㆍ진보 대립이 오버랩됐고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 또한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김상헌과 최명길의 척화ㆍ주화 논쟁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다. 다만 그의 문집을 읽으며 지금 우리가 한 번쯤 곱씹었으면 하는 구절을 두서 없이 적어본다.
첫째는 붕망(朋亡), 즉 붕당의 격화로 나라가 망하는 것을 걱정하여 최명길은 늘 “그 일은 공격하더라도 그 사람은 공격하지 말라”고 스스로 다짐했고 주변 지인들에게도 권고했다고 말한다. 그는 직접 풀이한다. “그것은 성인(聖人)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있으며 그 사람이 비록 뛰어나다 하더라도 정말로 잘못을 범했다면 언관(言官)된 이는 그 일에 따라서 규탄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작은 잘못으로 인해 그 사람의 인격과 능력 전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특히 지금의 언론 종사자들에게 해주는 말로도 들린다.
둘째는 최명길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압축된 다음과 같은 말이다. “도리에는 상도(常道)와 권도(權道)가 있고 일에는 가벼움과 무거움(輕重)이 있으며 때에는 마땅함(義)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주역(周易)’에서 중(中)이 정(正)보다 귀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공자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최명길이 참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한 눈에 보여주는 구절이 다. 평상시에야 상도를 따르는 것이 맞지만 위급할 때는 권도(權道), 즉 그 상황에 맞는 대책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고 일은 명분보다는 실질을 중시해야 하며 때에 맞게 마땅한 도리를 찾아내는 깊은 지혜와 결단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정(正)은 명분론, 중(中)은 실질론으로 읽어내면 된다. 이것이 공자가 말한 시중(時中)이다. 보수ㆍ진보 할 것 없이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 하지 않고 머릿속 관념에 세상을 꿰어맞추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평생 시중(時中)으로 일관하며 수많은 오해와 비방을 받기도 했던 최명길의 말이기에 더욱 깊이 파고든다.
셋째는 그가 병자호란 이후 정승이 돼 실권을 장악하고 나서 반대파였던 척화세력을 대하는 태도다. “청론(淸論ㆍ척화파)의 무리가 비록 정세에 따라 선처하는 도리에는 어긋나지만 그 원칙을 지키는 이론 또한 폐기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오래도록 그들을 귀양 보내 둠으로써 사림이 억울해 하도록 하지 않음이 진실로 다스리는 도리에 맞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그냥 너그러워서가 아니어서 울림이 더 크다. “내정을 수습하고 외적을 물리치는 정책에 있어 만에 하나도 묘책이 없습니다.” 당색에 구애됨 없이 한 사람이라도 더 훌륭한 인재를 찾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로 보아 최명길은 한때의 궁여지책으로 친화(親和) 혹은 주화(主和)를 내세운 게 아니다. 어려서부터 ‘주역(周易)’을 공부해 다진 사상의 근력(筋力)이 튼실했다고 볼 수 있다. 또 그는 정묘호란 때도 이귀(李貴)와 함께 이미 주화론을 주창했으니 이른바 주자(朱子)를 떠받드는 서인(西人)의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주자에 머물지 않고 그 이전의 공자(孔子) 본래의 사상으로 돌아가려 했기 때문에 어쩌면 양명학(陽明學)으로까지 눈을 돌린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의 문집에는 다른 사람들의 문집과 달리 ‘논어(論語)’의 직접 인용이 유난히 많다.
그런데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최명길 평전이나 전기를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역사학계에 여전히 주자학적 사고의 잔재가 남아서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이한우 논어등반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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