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론은 혈액형으로 성격 맞추기와 비슷합니다. 그럴듯하지만 실은 고만고만한 얘기입니다. 그래도 끊이지 않는 건 스스로를 뭔가 있어 보이는 존재로 ‘투사’해보는 재미 때문일 겁니다. 20여년 전 ‘X세대’였던 적도,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영포티’인 적이 없을뿐더러, 그딴 거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저와 제 주변 동년배들이 보증합니다.
그나마 ‘트렌드 세팅’을 노린 X세대니 영포티니 하는 말은 귀엽기라도 합니다. “고객님 핏이 예술이에요” 말 같은, 돈 좀 쓰라는 앙탈 같은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그런 사탕발림에 “내가 바로 그 X세대요” “내가 바로 그 영포티요”라고 손 번쩍 드는 건 ‘트렌디’보다 ‘추태’쪽인 것 같습니다만.
세대론이 본격화된 건 아마 2007년 ‘88만원 세대’ 출간 이후일 겁니다. 지갑털기 상술에 가깝던 세대론이 “기성세대에 맞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라!”라는 저 책의 구호로 인해 정치적 대치선으로 바뀌었습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교육받은 기성세대는 이제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외쳐야 할 역사적 사명’을 수행 중입니다.
후세대의 아픔을 헤아린다는 건 어쨌거나 고무적인 풍경입니다. 그런데 이건 어떨까요. 2015년 문형표 복지부장관은 기존 국민연금체계를 두고 “세대간 도덕질”이라 발언합니다. 우익청년단체 ‘대한민국청년대학생연합’은 민주노총 앞에서 시위를 벌이면서 “연금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형님들이 독점하고 있는 일자리, 조금만 나누어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 다음에 나올 게 뭐겠습니까. 강성노조 깨뜨리고, 해고를 쉽게 하고… 등등의 얘기들입니다.
“사회문제의 책임을 자본가나 권력자와 같은 전통적인 기득권자에게 묻지 않고, 고임금을 받는 정규직 기성세대 – 그래 봤자 어차피 노동자일 뿐인 – 라는 ‘새로운’ 기득권자에게 전가”하는 겁니다. 이런 세대론은 “사회국가의 축소를 도모하는 세력이 ‘세대 형평성’을 통해 자신들의 정책적 주도권을 정당화하는 사회정책적 술책”입니다. 사회학자 전상진은 여기에다 ‘세대 게임’(문학과지성사)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세대전쟁이 벌어지면, 웃는 자는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촛불’과 ‘태극기’(책에선 ‘맞불’이란 표현을 씁니다)를 두고 ‘세대 대결’로 평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고립된 소수의 버팀목이 세대론입니다. “맞불(태극기) 세력은 민주ㆍ법치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회피했다. 그것으로는 도무지 자신들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대투쟁 프레임이 안성맞춤이다. 반민주ㆍ범법 행위는 무대 뒤로 사라지고 세대들의 공방이 주목받는다.”
1차 세계대전을 겪고 허무해진 이들을 지칭하는 ‘로스트 제너레이션(잃어버린 세대)’ 개념을 잘 써먹었던 영국 정치인 오스왈드 모슬리는 말년 자서전에서 이렇게 결론지었답니다. “세대전쟁은 계급전쟁보다 멍청하다.” 모두가 늙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이 담긴 챕터 이름은 ‘청년 팔이(Youth Racket)’입니다. Racket, 영어사전엔 ‘부당한 돈벌이’라고 나오는군요.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