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땅까지 손대고, 제가 조상들 뵐 면목이 없습니다.”
고향에서 살던 시절, 하루는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들어오셨다. 할머니 앞에 앉아서 한탄을 늘어놓았다. 6남매를 대학까지 시키느라 집안 땅을 팔았다. 조상 대대로 물려준 땅을 알뜰하게 지켜내지 못한 데 대한 자책감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다독이는 대신 꾸짖듯이 말끔하셨다.
“애들 공부시키느라 열심히 산 건데, 누가 너를 탓하겠노. 너만큼 잘한 사람도 없다!”
할머니의 배포가 느껴졌다. 그때부터 속으로 할머니를 정말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딸만 줄줄이 놓다가 ‘드디어’ 얻은 아들이었다. 할아버지의 나이가 많았다. 빨리 후대를 보고 싶어 아버지를 16살에 장가보냈다. 젊음을 즐길 사이도 없이 아버지는 ‘아버지’의 멍에를 매고 한평생 살아오셨던 것이다.
늘 부지런한 분이셨지만 내가 아버지의 진면목을 확인한 것은 평생 짓던 농사를 그만둔 이후였다. 우선, 농사를 그만두게 된 계기가 있었다.
1998년, 상주 속리산 일대에 폭우가 쏟아졌다. 서해안을 건너온 구름이 동해로 빠져나가야 하는데 상주에서 머물면서 하릴없이 330미리의 폭우를 쏟았다.
비가 몹시 내리던 날 밤, 아버지는 꿈을 꾸었다. 꿈에 먼저 간 아내(나의 어머니)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생생하게 보이더라고 했다. 꿈이 하도 선명해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잠을 깼다. 잠 깬 김에 밖을 둘러보려고 마루로 나왔다. 신발 한짝을 신고, 나머지 한짝을 꿰려는데 무언가가 와락 등을 밀쳤다. 아버지는 대문까지 밀려났다. 산사태였다. 흙이 집채를 덮친 거였다. 방에 누워있었다면 그대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상주 시내에 있는 아파트로 나왔다. 농사를 그만두진 않았지만 예전처럼 일이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릴 때 부친(나의 할아버지)에게 배운 한학을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학문적 성과는 대단했다. 뒤늦게 시작했지만 향교의 정교와 서원의 원장을 맡으셨고 요즘은 퇴직 공무원들 대상으로 한문과 시문을 가르친다. 아직도 하루에 3시간씩 공부를 하신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성실한 모습을 봐서 그런지 나도 좀 닮은 듯도 하다. 공무원 19년차에 세무사 시험에 도전했다. 그때 묘한 일이 있었다. 어쩌다 점쟁이와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가 단호하게 “올해는 죽어도 안 된다”고 했다.
시험을 보던 날, 점쟁이의 말이 맞겠단 생각이 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1교시에서 15점짜리 문제를 풀기만 해놓고 답안에 써넣는 걸 깜박한 것이었다. 그냥 집으로 내려갈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일단 마무리는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시작하면 성과를 떠나 늘 꾸준히 노력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 거였다.
들썩이는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끝까지 시험을 쳤다. 발표 3일 전에 아내가 꿈 이야기를 했다. 잘 익은 감이 담긴 상자 하나를 샀다는 거였다. 상자 안에 든 감은 60개, 세무사 커트라인이 60점이었다. 역시나, 3일 후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이후 틈틈이 공부하여 석사, 박사를 받았다. (이제는 박사 위의 ‘밥사’ 즉, 봉사도 할 생각이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눈물 젖은 두만강’. 술만 취하면 노를 저었다. 처음엔 그저 ‘아는 노래가 저것밖에 없나 보다’했는데, 살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깊고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처럼 부지런히 살아오셨다. 노를 멈추면 배가 물살에 실려 흘러간다. 나의 사공께서는 물살을 이기려고, 혹은 거슬러 올라가려고 얼마나 애를 쓰셨던가. 아버지는 16살에 결혼해 자식들을 배에 태우고 그 긴 세월을 사공처럼 노를 저어 물살을 거슬러 올라오셨던 것이다. 노래만 들으면 저절로 아버지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권일환 대구지방세무사회 회장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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