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신년사’ 하루 만에 화답
北 평창 참가 논의 제안했지만
유화 제스처 예상된 수순
“보상 요구할 것” “北 책략에…”
여야 모두 우려 목소리 나와
문재인 정부가 경색된 남북 관계를 풀기 위해 새해 초부터 속도를 내고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시사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신년사가 출발 신호였다. 하루 만에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 대화 복원 방안을 마련하라고 주문하자, 올림픽이 임박했으니 1주일 내로 고위급 회담을 열자고 곧장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북한에 제의했다. 과속은 금물이라는 단속이 나온다.
조 장관은 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회견을 열고 “정부는 9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고위급 남북 당국 간 회담을 제의한다”고 밝혔다. “남북이 마주앉아 평창 올림픽에 북측이 참가하는 문제에 대한 협의와 함께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상호 관심사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평창 올림픽에 대표단을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한 지 불과 28시간 만이다.
이런 속도전은 문 대통령의 의지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새해 첫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통일부와 문화체육관광부는 남북 대화를 신속히 복원하고 북한 대표단의 평창 올림픽 참가를 실현할 수 있도록 후속 방안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북한 대표단의 평창 올림픽 파견과 당국회담 뜻을 밝힌 것은 평창 올림픽을 남북 관계 개선과 평화의 획기적인 계기로 만들자는 우리의 제의에 호응한 것으로 평가한다”며 환영 입장을 표명하면서다.
1주일 뒤(9일)를 회담 날짜로 제안하며 정부가 가속 페달을 밟은 건 시간이 워낙 촉박해서다. 평창 올림픽 개막일(2월 9일)이 불과 한 달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담 장소로 지목된 판문점은 남북 간 소통의 상징적 공간이지만 2016년 2월 개성공단 폐쇄 이후 2년 가까이 단절된 상태다. 조 장관은 “남북 당국회담 개최 관련 판문점 채널을 조속히 정상화해야 한다”며 “가능하면 판문점 채널을 통해 의제와 대표단 구성 등 세부 절차를 협의해 나갈 것을 제의한다”고 했다.
일단 핵심 의제는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 관계자는 “회담이 열리게 되면 선수단 숙소와 방남 경로, 공동 입장, 응원단 문제 등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 관련 제반 문제부터 의논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4월 대선 후보 시절 최문순 강원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금강산 육로를 통한 북한 선수단 참가와 북한 응원단의 속초항 입항, 금강산 온정각 일대에서의 올림픽 전야제 개최 등과 같은 구상을 논의했다. 최 지사는 최근 북측에 “크루즈 선박을 준비해 이동과 숙박에 어려움이 없게 하겠다”고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의제가 남북 관계 문제 전반으로 확대될 공산이 크다. 조 장관은 “북측 참가 문제를 집중 협의해 나갈 계획이지만 서로 마주앉게 된다면 여러 가지 상호 관심 사항에 대해 논의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가능성을 열어놨다. 비핵화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평창 올림픽을 ‘평화 올림픽’으로 치러내고 나면 이를 동력 삼아 북핵 문제 해결의 단초도 마련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조 장관도 “우리가 북측에 제기해야 될 사항들은 북측에 전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 평창 지렛대로 대화 의지… 북핵까지 의제 오를 수도
文 “北 평창 참가 실현 위해
후속 방안 조속히 마련하라”
北이 제안 응할지는 미지수
통일부 접촉 시도에 반응 없어
전문가들 “대북 공조 틀 안에서
우선 평창올림픽 의제 집중을”
신년사에 전향적 메시지를 담긴 했지만 북한이 정부 제안에 쉽게 응해줄지는 미지수다. 평창 올림픽 참가를 시혜(施惠)로 여기는 데다 우리 정부가 적극성을 드러낸 이상 느긋하게 애를 태울수록 얻어낼 게 많다고 판단할 개연성이 있다. 실제 통일부가 이날 오전ㆍ오후 두 차례 판문점 연락관 접촉을 시도했지만 북측 반응은 없었다. 지난해 7월 우리 정부에 의해 이뤄진, 상호 적대 행위 중지를 위한 군사 당국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 회담 제안에도 북한은 요지부동 반응하지 않았다.
북한의 유화 제스처는 예상대로다. 지난해 11월 ‘핵무력 완성’을 서둘러 선언한 것도 갈수록 조여오는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핵ㆍ경제 건설 병진 노선’에서 벗어나 하루빨리 경제 쪽으로 방점을 옮겨야 한다는 조바심에서였고, 평창 올림픽 참가를 빙자한 평화 공세도 같은 맥락이라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딴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분명 북한이 보상을 요구할 거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국가정보원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전날 배포한 자료에서 “북한이 남북 관계 개선 의지를 표명한 것은 평창 올림픽 참가를 남측을 도와주는 것으로 인식, 그 보상으로 대북 경제제재 조치를 해제하고 경제협력 및 인도적 지원 재개를 요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또 “올림픽 참가를 명분으로 북한이 한미 군사훈련 및 미군의 전략자산 순환 배치 중단을 요구할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내다봤다.
여권의 걱정도 비슷하다. 남북 관계 해빙 조짐에 대체로 기대감이 큰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도 김정은의 신년사가 여전히 대미 강경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낙관론은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없지 않다. 이낙연 국무총리도 이날 정부 시무식에서 “남북 당국 간 대화가 오랜만에 열릴 것으로 보이지만 만만치 않은 대화가 될 것”이라며 “(여전히) 핵을 (개발)하겠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북한이 또 다른 대접을 요구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했다.
보수야당의 비판은 노골적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청와대와 정부가 김정은의 신년사에 반색하면서 대북 대화의 길을 열었다는 식으로 환영하는 건 북한의 책략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했고,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도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남북 관계 개선을 언급한 데 대해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을 무력화하고 핵무기를 완성하기 위한 시간 끌기용 제스처”라며 “남남 갈등을 부추기고 한미 간을 이간질해 대한민국 안보를 무너뜨리려는 전략”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조 장관은 “(대화 제의와 관련해) 미국과 긴밀히 협의했다”고 강조했다.
이에 일단 북한의 평창 올림픽 관련 문제로 최대한 의제를 좁히라는 게 전문가들의 제언이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결국 남북 대화를 통해 북한이 바라는 건 대북 제재 철회와 경협 재개, 나아가 미군의 적대시 정책 철회 유도인 만큼,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북 공조를 흔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의제와 입장을 정하겠다고 국제사회에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한다”며 “평창 올림픽을 안전하고 성공적으로 치르는 데 먼저 집중하고 이산가족 상봉이나 인도적 차원의 현물 지원, 연락 채널 복구 등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정지용 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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