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폭력범죄 41%는 분노가 동기
거듭된 좌절은 만성분노로 악화
가해자 대부분 사회ㆍ경제적 약자
정신병력이 피해의식 키우기도
#2
개인 문제로 치부하는 인식 바꾸고
경쟁 중심 사회 체질 개선해야
일본은 ‘은둔형 외톨이 센터’ 운영
조모(52)씨는 한겨울 편의점에서 생면부지 아르바이트생을 흉기로 8차례 찔렀다. 피를 흘리며 달아나려는 아르바이트생 머리를 밟았다. 잔혹한 살해의 동기는 비닐봉투 값 20원. 만취한 조씨가 건넨 숙취해소음료 3병을 봉투에 담아주지 않는다고 실랑이를 벌이다 아르바이트생이 경찰에 업무방해로 신고한다고 하자 분노가 폭발, 집에서 흉기를 들고 돌아왔다. 사건 겉모습은 언론에 보도됐다. 사소한 시비로 터진 분노범죄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현실 불만이 분노범죄의 방아쇠
분노의 근원은 지난해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다. 2010년 한국에 건너와 자동차공장에서 일했던 재중동포 조씨는 가족 생활비를 책임지느라 빚더미에 올랐다. 사건 직전엔 자녀가 암 수술 뒤 악화했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우울이 심신을 뒤덮었지만 홀로 사느라 속을 털어놓을 상대도 없었다. 현실 불만은 쌓여만 갔다. 대구고법은 “가족의 건강 문제와 경제적 부담감으로 우울감을 겪어 왔는데 이런 정신건강 상태가 일부 범행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평범해 보이는 이웃, 손님, 행인이 ‘욱’ 하는 순간이 범죄로 치닫는 상황은 더 이상 남 얘기가 아니다. 가장 최근 경찰청 통계(2015년)에 따르면, 상해나 폭행 등 폭력범죄 37만2,000건의 41.3%는 분노(우발적 범죄, 현실 불만)가 동기다. ‘화가 나서’ 사람을 해친다는 얘기다. 급기야 경찰은 지난해 처음 도로 위 분노범죄인 보복운전 통계(2,168명)를 집계했다. 우리는 분노가 범죄가 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이런 분노범죄는 크게 ▦현실 불만 ▦만성 분노 ▦정신 장애 3가지 범주(한국형사정책연구원)로 나뉜다. 조씨 사건은 현실 불만에 따른 것이다. 지난해 6월 충북 청주에서 인터넷 서비스 방문 수리기사를 등 뒤에서 칼로 찔러 살해한 권모(55)씨는 주식 투자 실패 등 경제적 어려움이란 현실 불만을 극도의 분노로 표출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분노범죄(묻지마 범죄) 231건 중 52건(22.5%)은 현실 불만을 이유로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
불만이 만성 분노로, ‘시한폭탄’
현실 불만은 만성 분노로 악화한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미국 예일대 심리학자들이 고안한 ‘좌절-공격 이론’을 들어 “목표가 거듭 좌절되고 현실의 벽에 자주 부딪치면 사람 심리가 공격적으로 변한다”고 설명했다. 현실 불만보다 더 위험한 단계다.
인천 남구 한 빌라에서 지난해 5월 새벽 주민 A(34)씨는 ‘펑’ 하는 소리가 들려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복도에 나와 있던 B(24)씨는 “이게 무슨 연기냐”고 묻자 다짜고짜 욕부터 했다. A씨 멱살을 잡고 흔들던 B씨는 집에서 빈 와인 병을 들고 나와 A씨 머리를 후려쳤다. 심지어 식칼까지 들고나와 휘둘렀다. B씨가 내세운 이유는 반말을 했다는 것이다.
인천지법은 B씨 범행 동기를 만성 분노로 봤다. “어머니의 부재와 멘토의 결핍 등으로 어렵고 상처 받은 성장기를 지냈다”는 것이다. “분노조절장애나 폭력 성향이 치유되지 않는다면 극도로 흥분된 상황에 직면할 경우 또다시 자해를 하거나 재범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만성 분노는 오랜 기간 겪은 불평등, 그로 인해 현실 불만이 축적된 상태라 범죄 ‘시한폭탄’에 가깝다. 2012년도 발생 분노범죄 수사재판기록을 전수 분석한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재판에 넘겨진 48명 대부분이 사회ㆍ경제적 약자였다. 36명은 직업이 없었고 11명은 일용직이었다. 35명은 월평균소득이 전혀 없었다. 절반(24명)이 최종 학력 중졸 이하거나, 유년기 가족불화를 겪었다. 잦은 실패와 좌절, 현실적 어려움이 범죄로 이어진다는 방증이다.
정신병력도 분노 키워
지난해 5월 중순 서울 강서구 한 도매시장에서 때아닌 칼부림이 벌어졌다. 이날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정모(30)씨가 하역작업이 끝나던 자정쯤 전혀 알지 못하던 한 직원의 목을 찔렀다. 정씨는 앞서 작업 도중 다른 직원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욕설을 하고 싸웠다. 흉기를 들고 작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기다렸지만 이 직원을 찾지 못하자 엉뚱한 사람에게 달려든 것이다.
정씨가 오래 전부터 우울증 등 정신 장애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무시 당한다는 생각이 들면 분노와 적대감에 쉽게 사로 잡혔고, ‘죽고 싶다’는 생각에 두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다. 서울남부지법은 “정신병력으로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다”라며 2년 치료감호를 명했다.
이처럼 일부 분노범죄는 정신병력으로 피해의식이 과도해진 상태에서 발생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최근 정신건강복지증진법이 개정돼 입원 기준이 강화됐지만 쏟아져 나오는 환자들에 대해 우리 사회는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우려했다.
사회 구조 개선, 화 내지 않는 사회
분노범죄 근절의 근본 해결책은 결국 사회 구조의 체질 개선이다. 노중기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쟁 중심 교육, 복지제도 부실 등 분노가 폭발할 수 있는 저변이 두텁게 축적된 게 현실”이라며 “분노범죄를 사회문제가 아닌 개인문제로 치부하는 사회 분위기부터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단기적으로는 개개인의 분노 게이지가 올라가지 않도록 지역사회가 움직여야 한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가족과 친구를 제외하면 한국 사회에 개인 분노와 정신건강을 다스리게 도와줄 제도적 장치가 없다”며 “지역사회에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지원센터’를 운영하는 일본 사례를 참고할만하다”고 말했다.
김민정 기자 fact@hankookilbo.com
강유빈 기자 yubin@hankookilbo.com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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