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드라마틱할 수는 없었다. 주말 밤마다 전국 광장을 뒤덮었던 촛불의 행렬, 헌정사상 유례가 없었던 현직 대통령 탄핵, 이로 인한 조기 대선과 새 정부의 출범, 곧바로 시작된 적폐청산 드라이브과 파격적 정책실험들까지. 2017년은 이렇게 휘몰아치듯 지나갔다.
이보다 더 위태로운 적도 없었다. 북한의 거듭된 핵ㆍ미사일 도발과 말로만 따진다면 훨씬 더 도발적인 미국 사이에서 국민들은 전쟁, 그것도 핵전쟁에 대한 공멸의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2017년은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는 좌절과 공포의 시간이었다.
유난히 대형 사건사고도 많은 한 해였지만 시간의 흐름 앞에서 이젠 환희와 분노, 희망과 절망, 통합과 분열의 기억도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 하지만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기 위해선 그 뜨거웠던 어제의 한 장면 한 장면들을 반추하고 음미해야 한다. 2017년 역사의 현장에 남겨진 흔적들을 따라가 봤다.
▦대통령 파면
헌법재판소의 주문대로, 3월10일 ‘대통령 박근혜’는 파면됐다. 연 인원 1,600만 명이 모였던, 또 그 수만큼의 촛불이 밝혔던 광화문광장은 국민의 주권을 구현하고 확인한 현장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한 해가 저무는 지금 광장에는 ‘대통령 퇴진 촉구’ 스티커만 찢기고 해진 채로 남아 그 날의 함성을 희미하게 전하고 있다. 스티커 속 수의를 입은 박 전 대통령의 합성이미지는 그대로 현실이 됐고 법의 심판은 아직 진행 중이다.
▦적폐 수사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검찰은 박근혜ㆍ이명박 정부 시절의 불법행위에 대한 대대적 수사에 착수했다.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과 군 정치공작 의혹, 국정원 특수활동비 상납 의혹 등 수사 중인 사건만 19건에 달한다. 이른바 ‘적폐 수사’를 통해 검찰은 42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이중 27명이 구속됐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비롯한 피의자들은 영장실질심사가 열린 서울 중앙지법 출입문에 어지러운 손자국을 남겼다.
▦북한의 잇단 도발
북한은 역대 최대 규모인 6차 핵실험을 비롯해 총 16차례의 미사일 시험 발사를 감행했다. 한반도는 물론 미국 본토마저 위협하는 북한의 무모함에 한미는 B-1B 전략폭격기 등 전략자산들을 총동원, 대북 억지력 과시로 맞대응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전투기가 뜨고 내렸을까. 2017년 한반도 긴장상황은 경기 평택 오산 미 공군기지 활주로에 수많은 전투기 이착륙의 흔적을 남겼다.
▦세월호 인양
3월23일 침몰 1,073일 만에 세월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녹슬고 때묻고 여기저기 구멍 난 선체는 희생자 가족들의 마음을 또 한번 할퀴었다. 7개월여의 수색을 통해 조은화ㆍ허다윤 양, 고창석 교사, 이영숙 씨의 유해가 수습됐지만 박영인ㆍ남현철군, 양승진 교사, 권재근씨와 혁규 군 부자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 미수습자 가족들은 결국 11월 18일 목포신항을 떠났다.
▦포항 지진
11월 15일 경북 포항 지역에서 큰 지진이 발생했고, 허약한 건물들은 무너지고 금이 갔다. 이로 인해 다음날 예정됐던 대입수능이 전국적으로 일주일 연기되는 초유의 결정이 내려지기도 했다. 포항엔 현재까지 75차례의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지진의 흔적을 안고 살아야 하는 주민들의 불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비정규직은 이 땅에 사는 약자들의 멍에와도 같은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야심 차게 ‘비정규직 제로’를 선언했지만, 이로 인한 경영상의 부담과 정규직과의 갈등 등 풀어야 할 숙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규직화의 속도도 더딜 수 밖에 없다. 한 비정규직 노조간부의 달력에 빽빽하게 적힌 투쟁일정이 아직 갈 길 먼 정규직화 정책의 현실을 보여준다.
▦귀순 병사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남측 건물 외벽엔 지금도 탄흔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11월 13일 북한군 병사의 귀순과정에서 이를 제지하기 위해 북한군이 쏜 40여 발의 총탄은 귀순 병사의 좌ㆍ우측 어깨와 복부, 허벅지 등 5곳에 총상을 입혔고 이 건물과 나무 등에 흔적을 남겼다. 이국종 교수의 도움으로 다행히 이 병사는 지금 회복중이다.
▦잔혹범죄
점점 더 잔혹한 사회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평범한 중년여성이 납치 살해의 표적이 됐고, 10대 여학생은 초등학생을 죽이고 유기했다. 천사의 탈을 쓰고 딸 친구까지 살해한 어금니 아빠의 엽기적 행적은 충격 그 자체였다. 흉포한 강력 범죄사건의 현장검증 때마다 피해자 역을 대신해 온 서울경찰청 과학수사팀의 마네킹에도 상처가 가득하다. 잔혹범죄의 흔적이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박미소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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