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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언론이 없으면 기레기도 없다

입력
2017.12.24 18:02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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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즈음 등장한 ‘기레기’ 표현은 올해 ‘기레기 시대’라 불릴 만큼 흔해졌다. 독자들이 기레기 딱지를 붙이고 비난과 불만을 토해낸 기사는 때로는 꼼꼼히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오보, 때로는 약자를 외면하고 기득권자 입장을 중시한 기성 언론, 때로는 그저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하는 기사였다. 기자를 쓰레기라 일컫는 주체적 요인은 폭넓고 복잡다양하다. 그 객체인 언론이 유발한 요인도 복합적이다. 사실을 보도했으나 독자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는 억울한 비판 대상도 있으나, 실제로 한심한 오보와 독자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단편적 저질 보도가 뒤섞여 있다는 점이 기레기 현상을 증폭시킨다.

그러면 기레기를 소탕할 방법은 없을까. 가장 단순한 방법은 언론을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리라. 신문, 방송, 통신사를 모두 없애고 페이스북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만인이 만인을 향해 알고 있는 정보를 교류하고 주장을 내세우면서 기존 언론을 대체한다면 어떨까.

그 결과를 따져보기 앞서 일단 언론사 폐업은 쉽지 않아 보인다. 언론사는 업의 본질상 공적 기능을 요구받지만 실제로 공적 자금이 지원돼 정부의 입김이 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공영방송과 국가기간통신사뿐이다. 신문사를 비롯한 대다수 언론은 뉴스라는 상품을 판매해 영위하는 민간 기업일 뿐이다. 과거 군사정권이 강제 통폐합 조치를 취한 전례가 있으나, 기레기가 아무리 밉다 한들 군사쿠데타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않는 언론사가 자연스럽게 도태되면 될 것같다. 좋은 기사를 보도하는 언론사는 큰 수익을 내고 우수한 기자를 선발ㆍ양성해 점점 품질이 좋아지고, 나쁜 기사를 생산하는 언론사는 시장에서 외면당해 문을 닫게 된다면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의 뉴스 시장은 이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구독료를 내고 종이신문을 사보는 소비자는 멸종 수준이고, 대다수 독자는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통해 공짜로 뉴스를 본다. 포탈 업체는 언론사에 헐값의 뉴스콘텐츠 전재료를 낼 뿐이고, 언론사가 연명할 수 있는 것은 보험 드는 심정으로 광고료를 내는 대기업 덕분이다. 좋은 기사는 장기적으로는 매체의 신뢰도를 높이겠지만, 수익으로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 언론사 입장에선 좋은 기사에 자원을 투입할 유인이 없고, 그래서 저널리즘 수준이 하락했다는 시각도 있다. 심지어 훌륭한 상품을 만들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을 취재한 MBC ‘PD수첩’은 황우석 지지자들의 거센 비난과 광고주 불매운동에 부딪혀 프로그램 자체가 폐지될 뻔했다.

언론을 없애자는 것은 물론 반어적 표현이었지만, 지금의 기레기 논쟁은 마치 ‘기성 언론 다 필요없다’는 식으로 비친다. 지금의 언론이 그렇게 심각하게 잘못하고 있다면, 언론이 제 기능을 잘 하기를 바란다면, 기자 개개인을 완벽함을 기대하는 것과 별개로 제도적 개선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좋은 기사=수익’이 되는 시장구조를 유도하려면 포털의 뉴스 유통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언론에 대한 공적 지원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레기가 미운 심정에, 진정 언론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러다 정말 ‘언론 없는 세상’이 올까 무섭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불통행태에 대해 비판 한마디 못하던 청와대 기자들에 대한 비판이 적지않았지만, 결국 그를 탄핵심판정으로 끌어낸 것은 국정농단을 폭로한 언론이었다. 그런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언론이다.

언론이 없으면 기레기도 없다. 동시에 중요한 제도개선과 권력감시, 부정과 불의에 대한 고발도 어려울 것이다. 권력이 비판에 무감하고, 감성적 주장에 여론이 휘둘리고, 목소리 큰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공익이 해를 입는 광경이 그려진다. 이미 제대로 된 언론이 없는 세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김희원 기획취재부장 h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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