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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360˚] 이렇게 ‘힙’한 한글이라면…세계가 주목하는 뮤지션 ‘예지’

입력
2017.12.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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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BBC가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발표한 유망 신인가수 리스트 '사운드 오브 2018'에 선정된 예지. BBC 홈페이지 캡쳐.
영국 BBC가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발표한 유망 신인가수 리스트 '사운드 오브 2018'에 선정된 예지. BBC 홈페이지 캡쳐.

“지금까지 이런 음악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영국 BBC가 음악 평론가들의 투표를 통해 발표한 유망 신인가수 리스트 ‘사운드 오브 2018’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이 들어 있었다.

예지(Yaejiㆍ24). 댄스음악의 일종인 딥하우스 음악을 만드는 한국계 미국인 음악가인 그는 이름과 외모가 마치 옆집 친구 같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존재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해외 팬들 사이에서 그는 이미 유명인사다.

2집 앨범 대표곡 ‘내가 마신 음료수(Drink I'm Sippin On)’의 뮤직비디오는 공개한 지 두 달만에 유튜브 조회수 420만건 이상을 기록했다. 2003년부터 마치 점쟁이처럼 ‘대박가수’를 예측해온 BBC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것이 우연은 아니다. 음악을 시작한지 겨우 4년, 두 번째 앨범을 낸 예지는 지난 10월에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음악가’가 됐다.

예지의 음악이 주목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데이즈드(Dazed)나 피치포크(Pitchfork)같은 미국의 유명 음악매체들은 한글과 영어가 섞인 몽환적 가사, 속삭이는듯한 노래와 랩, 한국음악과 미국음악의 신선한 결합 등을 요인으로 꼽는다.

그러나 예지에게는 거창한 설명이 필요 없다. “목소리가 부끄러워 속삭이듯 노래한다”는 그에게 음악은 그저 ‘나답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지의 ‘내가 마신 음료수(Drink I'm Sippin On)’ 뮤직비디오]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못했다

예지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5세까지 그곳에서 살던 그는 부모님을 따라 롱아일랜드와 애틀란타 등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예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부모는 외동딸이 점점 한국어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것을 보고 걱정했다. 여느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모국의 문화적 유산을 잃을까 고민한 것이다. 이후 가족들과 함께 한국에 온 예지는 부모를 따라 여러 국제학교를 다니며 청소년기를 이 땅에서 보냈다.

예지는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애틀란타의 학교에 다닐 때 완벽한 영어로 말하면 사람들이 놀라는 눈치였어요. 반면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나와 똑같이 생겼지만 무엇인가 공감할 수 없는 지점이 있었죠.”

그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인터넷 세계에 빠져들었고 한국의 대중음악 및 인디음악을 찾아 들었다. 지우개로 도장을 만들거나 직접 만든 스티커를 판매하는 소규모 자작(Do It YourselfㆍDIY) 동호회 활동도 했다.

미국에서 살던 예지의 어린시절. 예지 공식 페이스북.
미국에서 살던 예지의 어린시절. 예지 공식 페이스북.

이후 예지는 미국으로 건너가 카네기멜론 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다가 2학년 때 우연히 학내 라디오방송국 활동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실연의 아픔을 극복하려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하기 위해 방송국 문을 두드렸는데 그곳에서 대안 장르의 음악을 추구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그는 하우스와 힙합, 리듬앤블루스(R&B)를 듣고 디제잉을 배우며 미술과 음악을 접목했다. 그리고 학교 친구들이 소개해준 무료 작곡 프로그램으로 혼자 음악을 배웠다. 물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취직한 뒤에도 예지는 음악을 계속했다. 일을 마치면 집이나 클럽에서 작품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음악을 온라인 음악유통 플랫폼 사운드클라우드에 꾸준히 공개했다. 인디 음악가 중 하나였던 그는 어느덧 정식 기획사 굿모드 소속 음악가가 됐다.

언어로는 나 자신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어요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노래하는 예지의 음악 스타일은 여러 문화를 거친 삶에서 비롯됐다. 한국에 있던 시절 그는 사람들과 소통이 어려웠다. “한국어로는 나 자신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인터뷰매거진) 그렇다고 미국 문화에 완전히 녹아 든 것도 아니었다.

예지는 언어가 담아내지 못하는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가사를 쓸 때 언어와 상관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표현한다. ‘알 수 없는 내일을 손등에 동그랗게 펴서 덜어주고…’(Last Breath), ‘매주 하는 생각. What if it’s just me. 영화 한 편 끝나듯이. As real as it can be…’(Raingurl) 같은 가사들은 대부분 출근길에 떠오른 생각을 적은 것이다.

미국 음악팬들은 예지의 노래에 섞인 한국어 가사를 이국적이고 몽환적인 느낌으로 받아들인다. 중독성이 있다는 평도 많다. 예지는 “내가 무엇을 노래하는지 사람들이 모르기를 바랄 때 한국어로 말한다”고 설명했다. 한때 소통의 한계로 작용한 한국어가 이제는 표현의 경계를 뛰어넘는 요소가 된 것이다. 그는 “한국어 발음의 각진 느낌이 자율감각쾌락반응(ASMR) 같은 나른한 느낌을 준다”며 한국어 가사의 매력을 설명했다.(라우드앤콰이엇)

[예지의 ‘Last Breath’ 뮤직비디오]

예지는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작품에 고스란히 담았다. 지난 8월 발표한 곡 ‘라스트브레스(Last Breath)’의 뮤직비디오에서 한국 뷰티 유튜버들의 영상을 패러디했다. 2집 수록곡 ‘내가 마신 음료수’와 ‘래인걸’의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의상은 어머니가 젊은 시절인 1980년대 한국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예지는 미국 패션잡지 보그(VOGUE)와 인터뷰에서 “엄마가 한국에 있던 시절 어깨 넓은 큰 사이즈의 자켓을 입고 찍은 사진이 편안하고 이상하게 힘을 주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예지는 ‘래인걸’ 뮤직비디오 속 의상들을 그의 어머니가 젊은 시절 한국에서 찍은 사진(오른쪽)을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 예지 공식 페이스북 캡쳐.
예지는 ‘래인걸’ 뮤직비디오 속 의상들을 그의 어머니가 젊은 시절 한국에서 찍은 사진(오른쪽)을 보고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 예지 공식 페이스북 캡쳐.

BBC외에 수많은 음악매체가 예지를 올해의 신인으로 뽑았다. 그는 지난 1년간 성과에 대해 “키가 두 배는 더 큰 것 같다”고 말했다.(데이즈드)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미국 대증음악 순위를 기록한 빌보드차트 1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음악을 하면서 나와 같은 생각과 경험을 하고 같은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를” 바란다.

언어는 불완전하지만 예지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이 서로의 연약함을 공유하고 교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그에게 음악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 서로가 더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도록 만드는 팔레트”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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