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구 금융위원장이 2008년 특검에서 드러난 4조5,000억원 규모의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차명계좌에 과징금을 물려야 한다는 금융행정혁신위원회의 권고에 “취지는 공감하지만 현행 법에선 어렵다”는 입장을 내놨다. 또 민간 금융회사에 근로자추천이사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혁신위 주문에 대해선 “사회적 합의가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 정책으로 추진하긴 어렵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최 위원장은 21일 기자간담회에서 전날 혁신위가 내놓은 권고안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최 위원장은 “애초 혁신위 권고안을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밝혔고 지금도 그런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사실 혁신위 권고안이 이 정도로 나올 지 몰랐다”며 “혁신위 권고안을 충실히 따르되 실현 가능성 등을 충분히 감안해 신중히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위원회 자문기구인 혁신위는 20일 정책 전반에 대한 70여개의 개선안을 담은 최종 권고안을 금융위원장에게 제출했다. 개혁 성향의 민간위원 13명으로 꾸려진 혁신위는 파격에 가까울 정도의 내용을 다수 권고안에 담았다. 우선 노동이사제를 금융공공기관부터 도입하고 민간 금융사에 대해서도 근로자추천이사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해 볼 것을 당국에 권고했다. 또 이 회장의 차명계좌에 대해선 고율의 소득세 부과와 함께 금전적 제재에 해당하는 과징금도 물려야 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인터넷전문은행의 숙원인 은산분리(산업자본의 은행소유 제한) 규제 완화에 대해선 “은산분리 완화가 한국 금융발전의 필요조건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사실상 예외 인정을 허용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내놨다.
최 위원장은 그러나 이날 혁신위의 권고안에 대해 사실상 제동을 걸었다. 노동이사제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기획재정부가 주도해 큰 틀을 마련하고 있다. 그는 정부 안이 마련되면 이대로 금융공공기관에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최 위원장은 또 “경영진의 의사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하기 위해 이사회 구성원을 다양하게 할 필요가 있지만 근로자이사추천제를 도입한 유럽국가와 비교할 때 우리와는 법 체계가 다르고 노사 문화도 분명히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어 “금융권은 급여 수준을 비롯해 복지 수준이 다른 업종에 비해 상당히 양호하다”며 “금융권 노사 갈등을 보면 대부분 급여인상 등을 둘러싼 것들이 주를 이루는 만큼 이 부분에 대한 점검과 새로운 합의가 이뤄진 다음에 도입하는 걸 검토해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당장 도입은 어렵다는 뜻이다.
아울러 이 회장의 차명계좌에 과징금을 물리는 방안에 대해서도 “국회 차원의 입법 논의가 우선돼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혁신위는 2008년 삼성특검에서 드러난 이 회장의 4조5,000억원 규모 차명계좌와 관련, 해당 금융자산에서 발생한 이자와 배당소득에 90% 중과세를 하고 과징금도 함께 부과할 것을 권고했다. 과징금은 금융자산의 50%까지 물릴 수 있다. 이를 그대로 적용하면 과징금 부과액만 2조원을 웃돌게 된다. 하지만 현행 법에선 과징금을 물릴 법적 근거가 없다. 이에 대해 혁신위는 정부가 입법 등을 통해 과징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라고 권고했다. 최 위원장은 “사실 입법을 하면 삼성에만 과징금을 물릴 수 없고 동창회 통장처럼 선의의 차명계좌를 포함한 모든 차명계좌에 과징금을 부과하는 식이 돼야 한다”며 “우선 국회 차원에서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금융실명제법 시행 이후(1993년 9월) 발생한 이 회장 차명계좌 1,001개에서 발생한 이자·배당소득에 대해서만 90% 중과세가 가능하다고 밝힌 바 있다.
아울러 인터넷은행에 한해 은산분리 규제를 예외적으로 완화해선 안된다는 혁신위 권고안에 대해선 “은산분리 완화 원칙은 존중되는 게 타당하다”면서도 “현재 인터넷은행 영업 실적 등을 보면 은산분리 원칙을 훼손할 우려가 거의 없는 만큼 예외를 인정해줬으면 하는 게 저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김동욱 기자 kdw128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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