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써야 하는 작가, 책을 만들어야 할 편집자, 그리고 책 읽을 독자들이 모두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하여 추운 겨울부터 따뜻한 봄까지 아스팔트 위를 메웠다. 그렇다면 올해 출판은 망해야 했다. 그런데 반대다. 새 시대는 작가와 편집자들에게 빛나는 통찰과 투지를 불러일으켰나 보다. 그 어느 해보다도 수작이 많았다.
최근 교양서에는 분명한 변화가 있다. 작가는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던지고 함께 고민할 데이터를 제공한다. 같이 아파하고 해결점을 찾기 위해 함께 고민하자는 것이다. 이제 독서란 답을 얻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찾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올해의 수상작들이 이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학술 분야의 ‘포스트 휴먼이 온다’는 인간의 미래를 조망한 책이다. 저자인 이종관 선생은 과학자나 공학자가 아닌 철학자다.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대변되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시민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고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관점을 하이데거를 매개로 하여 제시한다. 인공지능과 인공생명에 대한 질문 속에서 인간 존재의 참된 의미와 가치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긴 시간 다양한 방식으로 과학자ㆍ공학자들과 소통한 흔적이 역력하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생태계는 조선인들에게는 낯선 생태계다. 따라서 과거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자연지리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학술 분야의 공동 수상작인 ‘조선의 생태환경사’(김동진)는 바로 그 지점을 파고들었다. 생태학적인 측면에서 역사를 보는 시각을 제공하면서 이에 걸맞은 자료를 제시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교양 부문에서 예심을 통과한 10종의 책은 모두 수작이다. 여느 해 같으면 수상작을 결정하기 위해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픔이 길이 되려면’(김승섭)이 너무 압도적이었다. 과학, 인문, 사회과학 어느 분야로 봐도 최고였다. ‘저자인 김승섭 교수가 앞으로 이런 책을 또 쓸 수 있을까?’ 심사위원들은 그럴 수 없을 것으로 봤다. 지난 10년간의 연구 결과가 고스란히 시민의 가슴과 머리로 스며드는 작품이다. 어느 기자의 말처럼 이제 우리도 이런 책을 가질 때가 되었다. 작년과는 정반대로 올해에는 저술 부문의 수상자가 모두 강단 학자라는 사실은 고리타분한 강단이 생동감 넘치는 연구 현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일까?
수상자 선정에 가장 고심한 부문은 역시 번역이다. 번역의 외로움과 고단함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가 쉽지 않다. 심사위원들은 번역 부문에서는 단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그의 전작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민중사’와 ‘더 레프트’ 등을 통해 한국 지성계에 큰 영향을 끼친 유강은 선생의 ‘미국의 반지성주의’와 ‘신들의 전쟁, 인간들의 전쟁’과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 등 전작을 통해 주목받은 바 있는 이재황 선생의 ‘실크로드 세계사’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넓고 깊은 이야기를 폰트마저 단순한 그림으로 흡수한 ‘간질간질’(서현)을 어린이·청소년 부문 수상작으로 골랐다. 아이들을 춤추게 한 책이다. 편집 부문은 출판사 세 곳이 모여서 기획·발간·판매하는 데 성공한 ‘아무튼 문고’를 선정했다. 점점 힘들어지는 출판환경 속에서 작은 출판사들이 공존하는 법을 보여준 탁월하면서도 시대정신에 맞는 기획이라고 판단했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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