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제1야당이 ‘사회주의 예산’이라고 부른 2018년도 예산안이 얼마 전 통과되었다. 이 당의 공식논평이 맞는 말이라면 사회주의 예산인지도 모르고 원내대표가 잠정합의까지 했으니, 그 원내대표의 ‘사상’은 상당히 의심스러운 수준이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과학기술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과학기술 관련 예산이 어떻게 편성되었나 하는 점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척 실망스럽다. 내년 예산은 428조8626억 원으로 전년대비 7.1% 증가했다. 과학기술분야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부)의 예산은 14조1,759억 원으로 전년대비 0.6% 증가에 그쳤다. 증액 비율이 전체 예산 증액 비율의 10%가 채 되지 않는다. 전체 연구개발(R&D) 예산은 19조7억 원으로 전년대비 1.1% 증액되었다. 너도 나도 앞 다투어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현실에 비하면 초라한 예산이다. 세부사항을 들여다보면 더욱 실망스럽다. 개인 기초연구 사업비는 애초 정부의 1차 안에서 후퇴해 1조4,200억 원으로 책정되었다. 기획재정부(기재부)에서 먼저 400억 원을 삭감했고 국회에서 다시 400억 원을 깎았다. 연구과제 개수로 치자면 약 700여 과제가 사라진 셈이다.
풀뿌리 연구예산을 깎는 대신 어떤 예산을 늘렸을까? 가장 눈에 띄는 분야는 사회간접자본 예산이다. 당초 정부안보다 국회에서 1조3000억 원 늘려 19조 원을 통과시켰다. 원래 정부안이 전년 대비 20% 삭감된 액수였다고 해도 국회에서 더 늘린 액수는 다른 분야에 비해 독보적으로 많다. 주로 영호남 지역 국회의원들의 민원성 지역도로 사업에 수백억 원에서 많게는 1,000억 원이 증가했다. 국회에 진출하는 과학기술 전문가들이 점차 많아지는 추세라지만 겨우 몇 백억 원짜리 기초연구 예산도 지키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한숨이 앞선다. “청년과학자와 기초연구 지원으로 과학기술 미래역량 확충”은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36번)이다.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도로만 깔면서 먹고 살자는 건가?
예산뿐만이 아니다. 촛불혁명으로 맞이한 새 시대에 거는 과학기술계의 기대는 무척 크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시절 정부의 과학기술 전담부서가 폐지되거나 창조경제의 쓰나미가 몰아쳤다. 이제는 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야 한다. 과학기술이 정부에서도 사회에서도 제자리를 찾으려면 최소한의 정책 독립성이 확보돼야 한다. 정책 독립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예산권이다. 지난 11월 국가 R&D 예산권을 과기부에 이관하기로 부처 간 최종 조율되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핵심 내용은 이렇다. 국가 R&D 예산의 전체 규모와 부처별 예산규모를 앞으로는 기재부와 과기부가 협의해서 결정한다. 지금까지는 기재부 단독으로 결정했다. 또한 R&D 예비타당성 조사권을 과기부가 단독으로 행사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회에서 과학기술기본법과 국가재정법을 고쳐야 한다. 지난 6월 우원식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은 아직 처리되지 않았다.
물론 이 문제는 민감하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R&D 예산은 기재부가 다른 부서와 협의하는 유일한 예산이 된다. 과기 분야에만 특권적 예외를 인정한다는 불만이 나올 법하다. 하지만 과학은 매우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지식체계라는 점도 감안해 주었으면 한다. 경제논리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는 OECD 국가들 중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없는 유일한 나라이다. 국립자연사박물관을 건설하자는 논의는 30여 년 전부터 본격화했다. 그러나 고비마다 예비타당성조사의 비용편익 분석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오면서 번번이 좌절됐다. 이런 나라에서 해마다 10월이면 하나같이 노벨상 타령을 하는 현실이 기막힐 뿐이다. 40여 년의 노력 끝에 중력파를 검출해 올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라이고 연구진에 한국 기준을 적용했다면 아마 그 프로젝트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치권은 말로만 4차 산업혁명을 떠들기 전에 낡은 생각의 틀부터 바꾸는 인식의 혁명부터 시작해야 한다.
과학기술계에만 특혜를 주는 게 부당하다면, 종교인들에게 유별나게 특혜를 베푸는 소득세법 시행령 개정안부터 손을 봐야 하지 않을까? 개정안에 따르면 종교활동에 사용되는 ‘종교활동비’는 상한선 없이 과세 대상에서 제외된다. 뿐만 아니라 그 장부를 따로 만들면 세무조사도 못한다. 종교인에게도 세금을 걷자고 했더니, 아예 합법적으로 종교인 탈세의 길을 터 준 셈이다. 이 특혜에 비하면 R&D 예산권 이전은 그리 유별난 특혜는 아닌 것 같다. 게다가 각각의 특혜를 베풀었을 때 기대되는 긍정적인 효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종교활동비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반 신앙인들에게 얼마나 큰 혜택이 돌아갈까?
우리는 지금 중세 암흑기가 아니라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21세기에 살고 있다. 특혜를 줘도 과학기술계에 특혜를 줘야 어울리는 시대이다. 종교와 과학의 전도된 지위, 법을 어긴 범죄행위는 아니지만 적어도 꼭 청산해야 할 구시대적 적폐임은 분명하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