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1887~1964)는 53년 4월 국회 연설에서 48년 제정된 국가보안법 폐지를 제안했다. “형법만 가지고도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할 대상을 처벌하지 못할 조문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해방 정국에서 좌우합작을 추구한 유력 정치인 중 한 명이었지만, 6ㆍ25 전쟁 중 빨치산에 의해 아내를 잃은 반공주의자였다.
법학자로서 그는, 서슬 퍼런 반공국가에서 국가보안법이 지닐 수 있는 정치적 파괴력을 감지했을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 이승만과의 해묵은 불화, 특히 반민특위 해체와 특위법 개정, 한 해 전의 ‘부산 파동’ 등 자유당 정권이 보였던 초법적 전횡도 께름칙했을 것이다. 그의 53년 제언은 하지만 한국 역대 정부와 국회에 의해 지금까지 묵살되고 있다.
김병로는 법치주의자였고, 현행 법의 테두리 안에서 민주주의자였다. 그리고 광의의 ‘사법적극주의자’였다. 이승만이 그의 재임 중 정적 제거 및 권력 유지에 불리한 일련의 법원 판결에 항의하며 사법부를 비판하자 그가 “이의가 있으면 항소하면 될 일”이라고 대꾸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사법부 독립과 법관의 존엄을 중시했던 것은 법치와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원칙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완고한 귀족주의자였고, 엘리트주의자였다. 하지만 그의 귀족주의는 ‘군림’의 권리보다 ‘솔선’의 의무를 앞세운 귀족주의였다. ‘거리의 사람’이란 의미의 아호 가인(街人)도 스스로 지었다는 설이 있다.
가인 김병로는 1887년 12월 15일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유학을 익혔고, 을사조약 직후 의병운동에 가담했고, 인촌 김성수의 ‘창흥학교’를 거쳐 일본 메이지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귀국 후 강의를 하다가 1919~20년 판사로 재직한 뒤 변호사로 전업, 농민 쟁의와 만세운동, 독립지사들의 치안유지법 사건 등 숱한 시국사건을 맡으며, 32년 일제에 의해 자격 정지를 당할 때까지 조선 전역의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경기 양주로 내려가 농사를 짓다가 정계에 입문한 그는 해방 정국의 한민당에 적을 두면서도 좌익과의 협력을 추구했고, 당론과 달리 무상분배 토지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미군정 과도정부의 사법부장을 거쳐 초대 대법원장에 임명돼 57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재임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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