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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민생은 장기판의 졸이 아니다

입력
2017.12.14 14:1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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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습을 보려고 천만이 넘는 시민이 차디찬 찬바람을 맞으며 광장에서 촛불을 밝힌 것이 아니다. 이런 모습을 보려고 70%가 넘는 시민이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어떻게 민생복지가 여야 정치권의 정략적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있나. 최근 국회에서 진행된 2018년 예산안 타결 과정을 지켜보면서 대다수 국민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지난 2015년 국제통화기금은 한국을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등과 함께 명목소득과 구매력 기준 소득 측면에서 가장 발전한 10개 선진국 중 하나로 선정했다. 일부 언론은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목적에 두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한국이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는 우리 자신의 삶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전쟁 중인 국가의 국민보다 낮으며, 산업화의 역군이었다고 칭송받는 노인세대의 절반은 빈곤에 신음하고 있다. 자살률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며 중산층을 포함한 대부분의 평범한 가구는 자녀 양육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다. 청소년은 모든 것을 희생하며 입시에 매진하지만, 청년의 태반이 백수가 되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기초연금을 올리고, 보편적 아동수당을 제도화하고, 민생복지 공무원을 늘리는 일은 포퓰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민생복지를 확대하는 일은 정략적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1인당 GDP가 한국의 절반도 되지 않는 터키의 2014년 복지지출이 GDP의 13.5%인데 반해 2016년 한국의 복지지출은 10.4%에 불과했다. 도대체 무엇이 퍼주기이고 포퓰리즘이란 말인가. 문재인 정부가 요구한 복지예산을 모두 집행한다고 해도 한국의 복지지출은 여전히 OECD 최하위 수준이다.

자유한국당의 정략적 억지 주장을 받아들여 기초연금의 인상과 아동수당의 시행 시점을 지방선거 이후인 9월로 미루고, 민생복지 공무원의 증원 규모를 3천 명 가까이 줄인 여야 합의를 보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할 말을 잃었다. 억지를 부리는 야당이나 야당의 억지 주장에 동의해준 여당 의원들에게는 지급 시기를 연기하고, 공무원 증원을 감축하는 것이 장기판의 졸을 움직이는 일과 같은 가벼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천 원을 벌기 위해 폐지를 줍는 노인과 취업문제로 고통 받는 청년에게는 피눈물 나는 생존의 문제이다.

한국 복지제도의 현실을 냉정하게 평가하면 사회보험제도는 영세 자영업자, 비정규직, 대다수 여성 노동자가 배제된 역진적 선별주의 제도가 대부분이다. 공공부조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수급자보다도 더 많은 비수급 빈곤층이 존재하고, 기초연금 또한 중산층이 배제된 제도이다. 이처럼 한국의 사회보장제도가 광범위한 사각지대가 있는 현실에서 여야는 한국 복지제도의 역사상 최초의 보편적 소득 보장제도가 되었을 아동수당을 아무 근거도 없이 소득 상위 10%의 가구를 제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다.

여야는 도대체 누구를 바라보며 정치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여야 간에 이루어진 2018년 예산안 합의에는 민생도, 민주주의도, 실리도 없는 그야말로 국민의 뜻을 외면한 정치권의 정략적 타협의 전형이다. 민생문제가 밀실에서 법적 근거도 없는 몇몇 정치인이 모여 주고받는 담판으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동수당의 보편적 제도화가 향후 한국 복지국가의 방향을 결정할 중요한 출발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유한국당의 부당한 요구에 동의한 민주당의 소신 없는 태도를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국민은 민생을 외면하고 정략적 타협으로 이루어진 2018년 예산한 합의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민생은 장기판의 졸이 아니다.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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