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후 12시 서울 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광운대역 방향의 지하철에 탑승한 김지은(28)씨는 임산부 배려석들을 힐끗 쳐다봤다. 하지만 분홍색 바탕으로 표시된 임산부 전용 좌석들은 이미 노인들의 차지였다. 난처한 표정의 김씨의 옷엔 ‘임산부 배지’가 붙어 있었고 이를 본 한 승객은 서울교통공사 고객센터에 “임산부 배려석에 임산부가 아닌 사람이 앉아 임산부가 불편을 겪고 있다”는 문자를 보냈다. 이어 이 열차에선 “임산부 배려석은 임산부를 위한 자리니 비워주시면 감사하겠다”라는 내용의 방송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던 노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김씨는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 임산부 배려석 신고 요령 글들이 올라와서 그런지 이렇게 대신 신고를 해주는 분들이 늘었다”며 “오늘은 목적지인 석계역까지 서서 갔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확실히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서 갈 때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서울 지하철 내 ‘임산부 배려석’과 관련된 민원이 급증하고 있다. 최근 들어 여성 이용자가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배려석 위반 신고법 등이 활발히 공유되면서다.
13일 서울 지하철 1~8호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지난달 1~27일 고객센터 등에 접수된 임산부 배려석 관련 민원은 모두 5,662건에 달했다. 이는 지난 1~10월 1,829건의 민원에 비하면 불과 한달 동안 신고율이 300%나 폭증한 수치다. 교통공사 관계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온라인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실제 지난달 초부터 SNS와 여성 이용자가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임산부 배려석을 차지한 남성들을 신고하자’는 내용의 글이 올라와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임산부 배려석 신고법과 인증 사진을 올리며 신고를 독려했다.
반면 남성들은 이런 움직임에 반감을 나타냈다. 임산부 배려석에 여성만 앉을 수 있다는 자체가 역차별이란 주장에서다. 이날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던 70대 남성 B씨는 “자리에 너무 유난을 떠는 것 같다”며 “요즘 이런 것들 때문에 더 성 대결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전했다.
대학가에서도 임산부 배려석은 ‘뜨거운 감자’다. 지난 12일 서울 소재 한 대학의 익명 페이스북 페이지엔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달라”는 취지의 글이 올라와 때아닌 설전이 벌어졌다. 학생들은 찬성과 반대 입장으로 나뉘어 “초기 임산부를 위해 비워둬야 한다”와 “양보가 의무인지 아느냐”며 치열한 갑론을박을 벌였다.
민원이 폭증하면서 기관사의 업무 부담이 과중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신을 지하철 2호선 기관사라고 소개한 누리꾼은 지난달 11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민원이 너무 많이 들어와 고통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배려석 관련 민원은 관제센터를 거쳐 민원이 접수된 차량의 기관사들에게 전달된다. 내용을 통보 받은 기관사는 배려석과 관련해 안내 방송을 내보내거나 문제의 승객에게 이 내용을 알려야 한다.
임산부 배려석은 서울시가 2013년 저출산 시대를 맞아 임산부 보호 차원에서 도입한 제도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현재 서울 시내 지하철 1~8호선에 설치된 임산부 배려석은 모두 7,140석이다. 남성이나 임신하지 않은 여성이 임산부 배려석에 착석하는 게 위법은 아니다. 하지만 교통공사측은 초기 임산부 등을 위해 가급적 자리를 비워둘 것을 권장하고 있다. 글ㆍ사진=이순지 기자 seria112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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