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정의개발당, 하마스와 전통적 우호관계
사우디와 달리 미국과 관계도 불편해져
‘이슬람세계 지도자’ 존재감 과시 포석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중동 국가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지만, 특히 격렬하게 반응하는 국가는 전통적으로 중동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미국의 파트너 역할을 했던 터키다. 한때 시리아 견제를 위해 이스라엘과 관계 개선까지 노렸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미국과 이스라엘에 맞서 ‘팔레스타인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9일(현지시간) 터키 대통령실을 인용한 터키 관영 아나돌루통신에 따르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통화해 미국의 예루살렘 정책을 되돌리기 위한 공동 노력에 합의했다. 한편 공개석상에서 “이스라엘은 점령국”이라며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10일에는 터키 동부 시바스에서 한 연설에서 “팔레스타인은 순수한 피해자, 이스라엘은 테러 국가다”라며 비난의 수위를 한층 더 끌어올렸다. 이슬람주의와 민족주의가 한창 끓어오른 터키 민심도 에르도안 대통령을 지지, 이날 이스탄불에서는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대가 대규모 집회를 열고 팔레스타인 국기와 터키 국기를 나란히 흔들며 행진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다는 소문이 중동 외교가를 통해 퍼지자 “미국이 거기까지 간다면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끊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 후에는 6일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7일 프란치스코 교황, 8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잇달아 통화하며 예루살렘 문제를 논의했고 13일에는 이스탄불에서 자신이 의장을 맡고 있는 이슬람협력기구(OIC) 회의 소집을 예고했다.
주로 아랍 국가들과 보조를 맞추며 조용히 대응하고 있는 사우디와 달리 에르도안 대통령은 유난히 드러내 놓고 이스라엘을 향해 공세를 가하고 있어 숨은 의도가 주목된다. 국내에서는 권력 강화를 목적으로 터키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를 강조하긴 했지만, 외교 면에서는 이스라엘과 화해를 도모하는 현실주의자 면모를 보여 왔기 때문이다.
터키와 이스라엘은 2010년 인도적지원재단(IHH) 소속 터키인 활동가 10명이 이스라엘 특수부대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사건 이후 관계가 단절됐으나, 지난해부터 다시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섰다. 실제 터키가 지난해 7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인도주의 지원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보낸 화물선을 이스라엘이 아슈도드항에 입항시켰고, 터키 정부가 이스라엘 근해 천연가스자원 수입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협상에 임하기도 했다. 에르도안 정권은 이란-러시아와 미국-이스라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를 견제하고 자국 주변에 쿠르드족이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방지하는 전략을 구사해 왔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태도 변화가 어느 정도 예고됐다는 분석도 있다. 전통적으로 에르도안 대통령을 지지하는 집권 정의개발당(AKP)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장악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긴밀한 관계다. 따라서 터키 입장에서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정면충돌할 의제가 불거진 이상 팔레스타인의 강경한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최근 에르도안 정권의 대미관계가 썩 매끄럽지 않았다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터키가 지난해 쿠데타 시도의 배후로 지목한 재미이슬람학자 펫훌라흐 귈렌의 송환을 미국이 거부하고 있다. 지난 6월 에르도안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는 대통령 경호부대가 터키 민주화 요구 시위대에 폭력을 휘둘러 워싱턴 치안당국과 마찰을 빚었다. 최근에는 이란 제재를 위반한 혐의로 미국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이란계 터키인 레자 자라브가 터키 정부에 불리한 증언을 내놓아 새 외교마찰을 부르고 있다.
여기에 에르도안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이슬람세계 지도자의 지위를 탐내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로힝야 난민 사태가 심화한 9월에는 OIC 의장 자격으로 미얀마를 공개 비난했고 대대적인 인도주의 지원에 나섰다. 이보다 앞선 지난 6월에는 사우디 중심 걸프 국가들의 카타르 봉쇄를 불법이라고 비판하면서 카타르에 주둔한 터키군을 철수하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밝히기도 했다.
독재정권 강화에 나선 대가로 유럽연합(EU) 가입이 어려워졌고 미국과의 관계도 좋다고 볼 수 없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외교 난맥상을 타개하기 위해 ‘남방정책’을 개시, 미국이 후퇴하고 종파 대립이 거세지는 이슬람세계에서 약자를 지지하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나선 것이다. 외치뿐 아니라 내치에서도 자신의 지지기반인 이슬람주의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기에 에르도안 대통령으로서는 일거양득이다. 다만 터키도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쿠르드군에 압력을 행사하며 자국 이익을 추구해 온 데다, 중동 세계에서 사우디와 이란이라는 양대 강국이 건재하기에 터키의 소위 ‘리더십 외교’가 얼마나 힘을 발휘할 지는 미지수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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