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총’과 인연이 깊은 이가 또 있을까. 방시혁은 가수 백지영의 노래 ‘총 맞은 것처럼’을 만들어 작곡가로 인기를 누렸고, 총알을 막는다는 뜻의 영어 ‘불렛 프루프(Bullet Proof)’를 팀 이름에 활용한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을 키워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 제작자로 거듭났다.
방시혁은 주류 음악 시장에서 편견에 맞서 빛을 봤다. 총을 소재로 한 발라드곡을 내 처음엔 국내 정서와 맞지 않는다는 반감을 샀지만, 결국 이별의 슬픔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설득해 공감을 이끌었다. 방탄소년단도 비슷했다. 방시혁은 2013년 팀을 데뷔시킬 때 이름이 유치하다며 ‘방시혁이 탄생시킨 소년 그룹이냐’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사회적 억압을 방어해 청년의 목소리를 내겠다는 이야기를 입혀 10~20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냈다.
이심전심이었을까. 방탄소년단의 팬들은 팬클럽 이름을 ‘아미(ARMY)’로 지었다. 방탄복과 군대처럼 항상 함께 하겠다는 뜻에서다. 방시혁은 군대처럼 결속력이 단단한 1,000만여 대군(그룹 트위터 팔로워수)의 지원 속에 방탄소년단을 미국 유명 음악지 빌보드에서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톱10(7위)에 진입시켰다. 한국 가수 최초의 성과였다. 방시혁은 방탄소년단으로 한류의 저변을 넓힌 공을 인정받아 최근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상금 1,000만 원은 유니셰프한국위원회에 기부했다.
역경도 있었다. 방시혁은 JYP엔터테인먼트에서 작곡가로 활동하다 나와 2005년 빅히트엔터테인먼트를 차린 뒤 걸그룹 글램을 제작했으나 ‘쓴맛’을 봤다. 실패를 발판 삼아 그는 후배 프로듀서인 피독의 소개로 RM(김남준)을 만난 뒤 ‘무대에서 가장 멋있는 힙합 그룹’을 만들어야겠다며 방탄소년단을 기획했다.
곰 같이 푸근한 인상과 달리 음악 작업 할 땐 매섭기로 유명하다. 방시혁은 방탄소년단 일곱 멤버들에 데뷔 전 곡을 써오라는 숙제를 냈을 때 다들 ‘스왜그(Swagㆍ뻐김)’ 가득한 가사만 써 퇴짜를 놨다. 대신 또래 청춘처럼 멤버들이 겪고 있는 현실의 역경을 솔직하게 담아보라고 제안했다.
1994년 유재하가요제에서 동상을 탄 뒤 작곡가로 입문한 방시혁은 영감을 믿지 않는다. 그는 창작자를 노동자라 생각한다. 매일 작업실에 나와 곡 작업을 하지 않고선 결과물이 나올 수 없다고 여기는 ‘일개미형 창작자’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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