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렌스 핀치(Florence Finch)는 1915년 필리핀 북부 루손 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국-스페인전쟁(1898)에 참전했다가 눌러앉은 베테랑이었고, 어머니는 필리핀인이었다. 고교 졸업 후 수도 마닐라 주둔 미군 정보부대에서 속기사로 일하다 미 해군 병사를 만나, 진주만 공습 넉 달 전인 41년 8월 결혼했다. 남편은 결혼 다섯 달 만인 이듬해 2월 작전 중 전사했다. 마닐라는 그보다 한 달여 전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핀치는 자신의 혈통과 미군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일본군 연료기지 보급 전표원으로 취업했다. 그는 연료를 필리핀 레지스탕스에게 빼돌리거나 일본군에 늑장 보급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전쟁을 시작했다.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게 된 이후로는 더욱 대담해져, 음식과 의복 약품 비누 등을 빼돌려 미군 전쟁포로를 도왔다.
그는 44년 10월 일본군에게 체포돼 0.7평 감방에 수감됐다. 레지스탕스의 소재 등을 심문당하고 전기고문까지 받으면서 하루 죽 한 그릇으로 견딘 그는 이듬해 2월 미군에 의해 석방됐다. 당시 그의 몸무게는 36kg이었다.
그는 고모가 살던 미국 뉴욕주 버팔로로 이주했고, “남편의 복수를 위해” 해안경비대에 자원 입대해 만 1년 복무했다. 그는 전시 공적을 인정받아 47년 여성 최초로 ‘아시아-태평양 종군기장’을 받았고, 민간인 최고 영예인 자유메달(대통령 자유메달의 전신)을 탔다. 핀치는 뉴욕의 한 비서학교를 나와 코넬대에서 비서직으로 일했다. 47년 미 육군 베테랑(Robert Finch)과 재혼해 1남 1녀를 낳았고, 2016년 12월 8일 별세했다.
그의 공적은, 군과 해안경비대에서만 기억할 뿐 40년대 말 이후 거의 잊혔다. 그의 사연은 숨진 지 근 다섯 달 만인 2017년 4월 장례식을 계기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죽음 때문에 친지들의 크리스마스 휴가를 망칠 수 없다며, 만일 죽으면 장례식을 늦추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뉴욕 플레전트 그로브 시티 묘지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은 미 육군 의장대와 군악대가 도열한 가운데 육군장으로 치러졌다. 생전의 그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에 비하면 자신이 한 일은 사소하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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