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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함께 걸어온 길, 나누는 삶으로 완성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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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함께 걸어온 길, 나누는 삶으로 완성하고 싶어요!

입력
2017.12.07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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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애 전 대구남구청 주민생활국장

윤영애 전 대구남구청 주민생활국장
윤영애 전 대구남구청 주민생활국장

“날래 나오라우!”

인민군이 철수한다는 소문이 돌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간밤에 갑자기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부부는 외동딸을 남겨두고 총을 든 사람을 따라갔다.

“탕! 탕!”

이윽고 총구가 불을 뿜었다. 남편에 따르면 아내가 갑자기 코를 고는 것처럼 크으억, 크어억 거친 숨을 내쉬었다. 남편은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총에 맞은 줄도 몰랐다. 부부의 죄목은 아들을 국군에 입대시킨 것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혹시나 집에 돌아왔을 때 사람이 없으면 오랫동안 헤어져 지낼 것만 같아 집을 지키고 있다가 변을 당한 거였다. 비극적인 밤을 맞이했던 부부는 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다. 그날 집에 혼자 남겨졌던 딸은 내 어머니다.

인민군은 이렇게 저렇게 그러모은 마을 사람들을 집단으로 학살한 후 철수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 뒤로 시골로 들어가 사셨지만 몇 해 못 사시고 유명을 달리했다. 어머니는 “그날 밤 충격 때문에 오래 못 사신 것 같다”고 했다. 어머니에게도 트라우마가 남았다. 평생 총 소리만 들리면 괴로워했다. 텔레비전에서 총 쏘는 장면이 나오면 기겁을 하면서 채널을 돌렸다.

외삼촌은 후일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셨다. 이런 가족사 때문에 지금도 우리 집안은 무공수훈자와 참전용사 어르신들에 대한 생각이 각별하다.

어머니와 외삼촌. 외삼촌은 국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하고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어머니와 외삼촌. 외삼촌은 국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하고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남편이 없다는 건, 팔이 하나 없는 거나 같다”

횡액으로 부모를 잃은 어머니는 상주에서 대전으로 장사를 오던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 아버지는 상주에서 생산하는 명주 등을 대전으로 가져와 시장에 부렸다. 상주는 삼백의 고장(쌀, 명주, 곶감)으로 유명한데 그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두 분은 천생연분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있었다. 어머니는 결혼하시면서 누비포대기와 이불을 만들었다. 어머니가 가내 수공업으로 옷과 이불을 만들면 아버지는 이걸 들고 시장으로 가셨다. 내 어머니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운명은 모질었다.

“아이고, 배야!”

아버지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바닥을 떼굴떼굴 굴렀다. 내가 네 살 때였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복막염이었다고 했다. 정확한 병명은 몰랐다. 시장을 다니며 장사를 하신 까닭에 늘 몸을 움직였고 건강하셨던 아버지셨다. 그렇게 건강하던 분이 하루아침에 유명을 달리하고 나서 어머니는 얼마나 허망하셨을까.

아버지가 딸 하나 달랑 남기고 떠난 뒤 어머니는 더 강해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하시던 일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대전 중앙시장에서 옷을 떼와 함창에서 팔기도 했고, 누에를 치는 집을 방문해 고치를 구매해서 실을 잣는 집에 팔기도 했다. 때로 명주로 수의를 만들어서 머리에 이고 경주까지 가서 팔고 오시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 시절을 떠올리면 늘 “술장사 빼고는 다 했다”고 고백하신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집은 가난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워낙 열심히 일하신 덕분이었다. 아버지가 안 계셨던 까닭에 늘 조금은 주눅이 들어 있었지만, 돈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은 없다. 초등학교 시절은 그럭저럭 무난히 지냈던 것 같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다시 굴곡이 찾아왔다. 어머니로서는 남편 없는 설움을 겪은 셈이었다.

하루는 어머니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집에서 혼자 술을 드셨다. 나는 어머니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남편이 없는 건 말이다, 오른팔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과 같구나…….”

그때 잘 아는 분에게 돈을 떼였다. 사업에 투자를 한 셈이었는데, 사업이 망해버렸다. 어머니는 투자금을 한푼도 건지지 못했다. 아등바등 모아서 조금씩 사두었던 땅도 그때 다 날렸다.

우리는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해보니 한 지붕 아래 네 가족이 살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고단한 셋방살이를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진로상담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공무원 시험을 보라고 했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처럼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었던 거였다.

“어머니가 강한 분이긴 하지만, 혼자서 너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심하시겠니. 대학은 나중에 다녀도 돼. 방통대도 있고. 우선 니가 취직해서 돈을 버는 게 더 좋을 것 같구나…….”

그때 마침 공무원 시험 응시 연령이 낮아졌다. 2월에 졸업한 후 3월에 시험을 치고 6월에 바로 발령을 받았다. 나는 여느 여직원들처럼 민원창구에서 일을 했다. 당시는 주민등록 관련 업무가 많았다. 시·도민증이 주민등록증으로 대체되던 시절이었다. 전산작업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일일이 손으로 작업했다.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녔다.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중간에 앉은 남자분이 나에게 공무원 시험을 권한 이상희 선생님이다.
고등학교 시절. 중간에 앉은 남자분이 나에게 공무원 시험을 권한 이상희 선생님이다.

나에게 늘 친절하던 그 남자, 사과밭에서...

“미스 윤, 왜 그렇게 일이 많아? 난 업무가 끝났는데 조금 도와줄게.”

비슷한 시기에 근무를 시작한 남자가 있었다. 나보다 일 년 일찍 들어온 사람이었는데 유독 나에게 친절했다. 나보다 나이가 열 살이나 많았던 까닭에 늘 예의바르게 응대했다. 나이 차이는 났지만 불편한 건 없었다. 동기나 다름없는 데다 나에게 워낙 잘해줬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데이트 신청을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오전이었다.

“사과 좋아해? 친구 중에 사과밭 하는 친구가 있는데 같이 갈까?”

나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시골길을 달렸다. 사과밭이 생각보다 멀었지만 싫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눈덮힌 들판이 너무 아름다웠다. 바람이 차긴 했지만 날씨도 푹해서 그만한 드라이브가 없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간혹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마을길을 지나가던 친구를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든든하고 친절한 남자는 내게 늘 로망이었다.

그날 프러포즈를 받았다. 사실, 처음부터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친구 부부는 도착했을 때부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친구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작전에 걸려든 셈이었지만 전혀 싫지 않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심 그 순간을 기다렸을지도 몰랐다. 친절하고 든든한 남자가 내 이상형이었다. 무엇보다 술을 안 마시는 것이 좋았다.

중학교 때 세 들어 살던 집에 학교 선생님 한분이 아내와 함께 살았다. 주사가 심했다. 술만 마시면 걸레 같은 욕설을 입에 물고 아내를 때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술 마시는 남자와는 절대 결혼 안 해야지’하고 결심했다. 나이가 조금 아쉽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이상형을 만났다.

결혼 후 대구로 왔다. 남편은 83년, 나는 84년에 적을 옮겼다.

결혼 하자마자 큰애가 들어섰다. 워낙 외롭게 자라서 아이를 많이 낳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1남3녀를 낳았다.

육아는 걱정이 없었다. 어머니가 계셨던 까닭이었다. 손녀 셋에 손자까지 어머니가 도맡아 키워주셨다.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학부모 초청 행사’가 있으면 늘 어머니가 가셨다.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딸을 시집보낸 후에도 늘 바쁘게 사셨다. 아이들 돌보는 건 물론이고 집안 살림도 어머니의 몫이었다. 워낙 요리 솜씨가 좋으셔서 집들이 음식을 하실 때도 많았다. 어머니는 늘 음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하셨다. 식재료를 다듬을 때부터 손길이 남달랐다. 내가 마음이 급해서 “엄마, 대강해!” 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늘 “음식은 정성”이라면서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주변에 옷을 해주실 때도 있었다. 언젠가 잘 아는 분이 “좋은 천이 있는데 한복을 만들고 싶다” 길래 어머니에게 부탁했다. 어머니는 실력을 발휘해 여름 모시한복을 지었다. 그때다 80년대 후반 무렵이었는데, 그 한복을 지금도 입고 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명품 장인이라고 생각한다.

나이 드신 후에는 경로당에서도 인기 최고였다. 맛좋은 반찬을 싸들고 오는 날이 많아서였다. 어머니가 집안 살림을 직접 하셨기 때문에 반찬이며 음식은 어머니의 권한이었다. 경로당에서 제일 인심이 좋았고 인기도 최고였다.

무엇보다 행복한 것은 딸들이 모두 어머니를 좋아하고 고마워한다는 점이다. 지금 어머니는 아흔을 넘기셨다. 97년에는 큰 수술도 하셨다. 큰딸이 할머니를 곁에서 보살피고 싶다면서 자신이 근무하던 창원 소재 병원에 잠깐 모시고 있었던 적도 있다. 딸들의 기특한 마음이 너무 고맙고 사랑스럽다.

둘째 딸 어린이집 행사가 있던 날. 어머니가 참여했다.
둘째 딸 어린이집 행사가 있던 날. 어머니가 참여했다.
어머니, 두 딸과 함께 소풍을 갔다.
어머니, 두 딸과 함께 소풍을 갔다.
2003년대 1월경. 딸 셋이서 한 달 동안 유럽 베낭여행을 다녀왔다.
2003년대 1월경. 딸 셋이서 한 달 동안 유럽 베낭여행을 다녀왔다.

우리 구청에 남자는 다 죽었나?

내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나는 남구청에서 근무하면서 공부에 대한 한을 풀었다. 92년부터 통신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해, 2001년 영남대행정대학원에서 석사를 취득하고, 2009년 대구한의대 대학원에서 노인의료복지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 나의 공직 생활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재무과에 발령을 받았다. 예산을 훤하게 꿸 수 있는 자리였다. 재정이 어떻게 책정되고 집행되는지 살피는 것은 곧 구청 업무를 제대로 꿸 수 있는 기회였다. 대개 남자 직원이 중책을 맡기 마련이어서 여자인 내가 발령을 받아 말이 많았다. “남구청 남자직원들 다 죽었나 보네” 하고 푸념하는 직원들도 많았다고 한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일했다. 암묵적으로 남자 직원에게 배당되던 업무를 여자인 내가 맡았다는 사실에서 큰 성취감을 느꼈다. 사실 공직에 몸담기 시작한 직후부터 보이지 않는 벽을 느꼈다. 소위 말하는 유리천장이었다. 좀 더 중요한 일을 맡고 싶은데, 잘할 자신이 충분한데 늘 민원실에만 발령을 받았다. 그 업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적성이나 능력을 불문하고 오로지 여자이기 때문에 어떤 업무를 맡는 풍조 자체가 싫었던 것이다.

재무과 발령은 나름대로 유리천장을 깬 사건이었다. 1등 공신은 내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집안 살림을 도맡아 주신 것도 있지만 늘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대학원에 진학할 때도 어머니는 “뭐든 하고 싶을 때, 또 할 수 있을 때 해라. 무조건 열심히 해라”하고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셨다. 어머니의 응원에 힘입어 ‘남자 못잖게’ 힘차게 일한 덕에 주변의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양성평등 관련 심포지엄에 참여해 발표를 하고 있다. 이 즈음 여성 공무원 지위 향상에 관한 논물을 썼다.
양성평등 관련 심포지엄에 참여해 발표를 하고 있다. 이 즈음 여성 공무원 지위 향상에 관한 논물을 썼다.
마지막 관선 남구청장 퇴임식날.
마지막 관선 남구청장 퇴임식날.
석사 박위를 받은 날.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관용 경북도지사다.
석사 박위를 받은 날.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관용 경북도지사다.

대구 남구의 영원한 고민, 미군기지

“윤 과장이 아니었으면 우리 남구가 들러리 신세가 될 뻔했어. 정말 수고했어!”

2007년 무렵이었다. 그때 ‘남구의 영원한 고민’으로 통하는 미군기지와 관련된 업무를 맡았다. 우선 미군기지 주변을 연구했다. 미군기지가 있는 원주와 춘천 등을 둘러보면서 공통적인 문제점과 남구만의 고유한 현상 등을 연구했다. 이렇게 발품을 팔아 모은 자료는 2006년 주한미군공여구역 주변지역 등 지원특별법률 발의에 참고 자료로 활용됐다.

사실 내 임무는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업무에 깊숙이 관여한 까닭에 결정적인 사안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법안이 통과되어도 남구는 아무런 혜택을 못 받을 상황이었다. 발의된 법안에는 미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는 면적이 10%이상 되어야 지원 가능하다는 조항이 있었다. 남구는 비율이 6% 내외였다. 법안이 통과되어도 남구에는 혜택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구청장님, 큰일 났습니다!”

나는 자료를 준비해서 구청장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법안을 설명하고 국방부를 설득시킬 방안을 준비해서 챙겨드렸다. 그 결과 남구에 불리한 조항들을 수정할 수 있었다. 일이 끝난 후 구청장님이 나를 불러서 짧고 굵직한 한 마디를 건넸다.

“해야 할 일을 했네. 잘했어!”

그날 어머니와 소주 한잔 했다. 물론 나 혼자 마셨다. 정말 딱 한잔이었다. 어머니는 눈시울을 붉혔다. 아무 말 없이. 그래, 무슨 말이 필요했을까.

2012년에는 동장을 맡았다. 임지는 대명동이었다. 많은 일이 기억에 남지만 가장 뿌듯했던 것은 대명시장의 물길을 다스린 일이었다. 대명시장은 비만 오면 물이 역류하는 지역이었다. 상인들이 여름이면 불안에 떨었다. 상인대표에게 이 사실을 듣고 바로 구청 건설과로 들어가 사정을 상세하고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들이대자’ 건설과 직원들도 발 벗고 나서주었다.

그 다음 해 여름, 장맛비가 한창일 즈음에 동장실로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받아보니 상인대표였다.

“동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동장님 덕분에 비가 와도 걱정이 안 됩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시장에 오시면 제가 소주 한잔 사겠습니다.”

잊을 수 없는 사건은 또 있었다. 주민 한분이 동사무소로 찾아왔다. 본인 집에 세 들어 사는 가족이 있는데 너무 힘들게 사는 것 같아 제보를 한다고 했다. 자기가 보기엔 기초생활수급을 받아야 할 것 같다는 거였다. 주인과 함께 셋집 문을 두드렸다.

“왜 찾아왔어요? 우리는 도움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가스도 끊긴 상태였다. 말을 섞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한사코 자기를 드러내기를 꺼렸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예전에는 잘 나가는 집안이었다. 노모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데리고 근근이 버티듯 살아가면서도 남에게 손을 내밀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기초생활수급 이야기가 나오자 발끈 화를 냈다. 나는 몇 번이나 찾아가 차근차근 설득을 했다.

“이렇게 도움을 받고, 나중에 형편이 나아지면 또 다른 사람들 도와주시면 되잖아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게 세상살이 아니겠습니까.”

남자는 오랜 설득 끝에 주변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도움을 주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하긴, 그 마음을 전혀 모르는 건 아니지.’

남자가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인 날, 나는 어머니와 함께 살던 시절을 생각했다. 세상에 여자 둘만 달랑 남겨진 그 고립감과 두려움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돌이켜 보면 미운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고운 사람이 더 많았다. 어머니는 늘 두 가지를 강조했다. 남의 것을 탐내면 안 된다. 신세를 지면 꼭 갚아야 한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였다.

어머니는 그렇게 힘들게 사시면서도 음식을 하면 꼭 이웃과 나누었다. 무료로 수의를 만들어주신 적도 많았다. 요즘으로 치면 재능기부였다. 그때는 ‘우리도 힘든데 왜 엄마는 날밤을 새면서 남들을 도와줄까’하고 생각도 했지만 지금은 이해가 된다. 미운 정도 정이라는데, 고운 정을 주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고마우셨을까. 그 마음을 이제는 이해한다.

공무를 수행하면서도 늘 어머니를 닮으려고 애썼던 것 같다. 복지과에 근무하면서도 업무이긴 하지만 ‘나의 일’보다 더 열성을 쏟을 때가 많았다. 어머니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지위가 올라가고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어머니처럼 더 많이 베풀 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했던 것 같다. 찌지고 볶고 했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그리울 것이다. 고운 정 나누며 살았던 사람들은 어떨까.

어머니 곁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도 마치 조카나 딸에게 하듯 나에게 진로를 진지하게 충고해주셨다. 아마도 어머니께서 없는 형편에도 두루 사람들에게 정을 베푸는 모습을 보셨기 때문에 자기 딸처럼 여겨주신 게 아닐까 생각한다. 부모 없이, 남편 없이, 늘 힘들게 살아오셨지만 누구보다 풍성한 인간관계를 형성한 어머니의 삶의 비결이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어머니는 이제 아흔을 넘긴 고령이다. 예전처럼 활달하게 다니시지 못하지만 내 마음의 문은 예전보다 더 자주 활짝 활짝 열어젖히신다. 어떤 어려움에도 강인한 삶의 태도를 잃지 않으시고 조금이라도 베풀 것이 있으면 주변과 정을 나누신 모습이 수시로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하고 보니, 나도 어느새 어머니의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어머니보다는 베풀 것이 조금 더 많겠지만, 그럼에도 마음의 크기만큼은 도저히 못 따라갈 것 같다. 그저 어머니의 자취를 따라 밟는 것만으로도 벅찬 느낌이다. 힘들어도 행복하다. 아닌, 힘든만큼 행복하다. 어머니를 따라간다는 것이 내게 얼마나 큰 보람이고 영광인지 모른다. 어머니가 못다 이룬 베품의 삶을 조금씩 조금씩 완성해가는 느낌도 들어 날마다 뿌듯하다. 더 잘해야지, 더 어머니를 닮아가야지. 날마다 그렇게 결심한다.

온갖 난관에도 결코 주저앉지 않고 끝까지 품위를 지킨 내 어머니, 삶의 내밀한 기쁨과 행복을 알게 하신 나의 영웅, 너무 고맙고 사랑합니다!

<윤영애 전 대구남구청 주민생활국장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어머니와 뮤지컬 ‘친정엄마’를 관람한 후.
어머니와 뮤지컬 ‘친정엄마’를 관람한 후.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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