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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침묵과 겸양이 미덕이 아닌 사회

입력
2017.12.06 13:0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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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화와 예술에 애정이 깊은 사람이며 다분히 미학적이기도 하다. ‘반드시 그렇기 때문에’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지만,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오바마의 연설하는 모습을 보면, 유연한 부드러움 속에 내포된 카리스마가 자못 멋지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이는 혹시 우리나라 정치인에게서는 잘 보이지 않는 면모가 목도되기 때문은 아닐까? 사실 이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배경문화의 차이에 따른 서로 다른 양상에 기초한 것일 뿐이다.

동아시아의 대표적 고전인 ‘논어’ ‘술이’에는 ‘교언영색(巧言令色), 선의인(鮮矣仁)’, 즉 ‘꾸며내는 말솜씨가 좋고 가장된 얼굴 표정을 잘 짓는 사람치고 어진 사람 드물다’라는 대목이 있다. 화려한 언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목도되는 것이다. ‘주역’ ‘계사’에도 ‘언부진의(言不盡意)’라고 해서, ‘말로는 뜻을 다하지 못 한다’는, 언어에 대한 비신뢰적 측면이 나타난다. 또 ‘노자’ 56장에는 ‘지자불언(知者不言) 언자부지(言者不知)’, 즉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장자’ ‘외물’에도 ‘득의이망언(得意而忘言)’, 즉 뜻을 얻으면 말은 잊으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우리 속담에 ‘빈 수레가 요란하다’거나,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것 역시 이러한 문화배경 속에 존재한다. 즉 동아시아에는 ‘가만히 있으면 2등은 한다’와 같은 침묵의 정서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이 경어의 발달과 더불어 웅변이나 토론을 막는 문화적 기제로 작용한다. 덕분에 우리 문화에는 무뚝뚝한 경직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약’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다’로 시작된다. 즉 동아시아와는 완전히 다른 언어에 대한 강력한 신뢰가 목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화배경 차이는 논리학이나 수사학 또는 웅변술의 발달에 있어서 동양과 서양이 크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차이가 현대로까지 유전되면서 드러나는 양상이 바로 동ㆍ서양 정치인의 연설인 것이다.

인도는 지역적으로는 동아시아와 가깝지만, 민족적으로나 문화적으로는 유럽과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언어학적 구분으로는 인도유럽어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즉 불교 역시 태생적으로는 언어에 대한 높은 신뢰구조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는 불교의 진언(眞言)이나 다라니(總持) 즉 ‘진실된 말에 대한 추구’를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불교의 언어에 대한 신뢰는 동아시아의 영향을 입으면서 빠르게 변모한다. 실제로 가장 중국적 불교인 선불교에서는 ‘불입문자(不立文字)’, 즉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곤 한다. 그러므로 가르침은 말이 아닌 마음과 마음의 전달인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현재 동아시아 불교에는 오늘날까지 진언 수행과 이심전심에 입각한 선불교의 명상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이는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번성하게 되었는지를 단적으로 이해하게 해 준다.

오늘날 우리는 서구문화의 영향에 의해 스펙과 자소서를 요구 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현대인의 당연한 권리이자 또 다른 실력으로 인식된다. 겸양과 침묵이 미덕으로 평가되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내 눈에도 오바마의 연설이 멋있게 비치도록 한 것은 아닐까? 또 우리의 정치인들도 미래에는 멋진 연설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서구화에 따른 전통 관념의 붕괴는 우리 문화에는 또 다른 어두운 그림자가 될 수 있다. 전통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무의식적 혼란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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