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의 제프리 펠트먼(58) 정무담당 사무차장이 북한의 초청을 받아 5일 나흘간의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국제 사회의 제재 압박으로 경제적ㆍ외교적 고립 상태에 놓인 북한이 유엔을 통해 인도주의적 지원과 제재 완화 등을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날 오후 1시 중국 베이징(北京) 서우두(首都) 공항에서 일행들과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으로 향한 펠트먼 사무차장은 방북에 대해 묻는 기자들에게 별다른 말 없이 “고맙다”고만 답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스테판 두자릭 유엔 대변인은 앞서 4일(현지시간) 미 뉴욕 유엔본부에서 "펠트먼 사무차장이 8일까지 방북해 상호 이해와 관심사를 논의할 것”이라면서 "리용호 외무상과 박명국 외무성 부상 등을 만날 예정"이라고 밝혔다. 펠트먼 사무차장은 아울러 방북 기간 현지에 파견된 유엔 관계자와 제3국 외교단을 만나고 유엔 프로젝트 현장도 방문할 예정이다. 평양에는 유엔의 6개 기관 50명의 직원이 활동하고 있다고 두자릭 대변인은 설명했다. 그는 북한이 지난 9월 유엔 총회 기간 펠트먼 사무차장을 초청했고 지난주 말 방북이 최종 확정됐다고 설명했다. 리용호 외무상은 유엔 총회 방문기간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 비공개 면담을 가진 바 있다.
유엔의 고위급 방북은 2010년 2월 당시 린 파스코 유엔 사무국 정무담당 사무차장과 2011년 10월 유엔 인도주의 업무조정국(OHCA) 발레리 아모스 국장의 방북 이후 처음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재임 시절인 2015년 5월 개성공단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북측이 돌연 방문 허가를 철회해 무산된 바 있다.
유엔 고위급 인사의 방북은 그간 북핵 위기와 관련해 중재 역할을 강조해온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의지와 제재 국면에서 외교적 돌파구가 필요한 북한의 이해가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두자릭 대변인은 “폭넓은 범위의 대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해 북핵 문제에 관한 논의도 시사했다. 펠트먼 사무차장은 방북기간 유엔의 대북 지원 사업을 점검하면서 북핵 문제에 대한 북한의 의중과 대화 가능성을 탐색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발사 후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북한은 유엔 고위급 인사 방북을 계기로 유엔의 대북제재 부당성을 부각시키면서 본격적인 대화 공세를 펼칠 가능성도 제기된다. 하지만 북한은 핵보유국으로 인정 받은 상태에서 협상을 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아 실질적인 대화 국면의 계기가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은 2010년 2월 파스코 당시 사무차장 방북 때도 대화 공세를 펼쳤으나 의미 있는 비핵화 의지는 보이지 않아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 박의춘 당시 북한 외무상 등을 면담한 파스코 사무차장은 방북 뒤 한국에 입국해 “북한이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북한은 파스코 사무차장 방북 직전에는 왕자루이(王家瑞)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도 초청하는 등 대화 분위기의 군불만 지피다가 같은 해 3월 천안함 폭침 사건을 일으켰다.
유엔주재 미국대표부 측은 “펠트먼 사무차장의 방북 계획은 알고 있다”면서도 “미국은 북한에 외교적ㆍ경제적 압박을 가하기 위해 안보리 회원국과의 협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대표부 대변인은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평화적인 외교적 해법을 찾는 데 초점을 두고 있지만, 북한은 신뢰할만한 협상에 어떤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대화파에 속하는 조엘 위트 존스홉킨스대 한미연구소 선임연구원도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방문이 의미 있는 중재 노력의 시작이 되리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미국 외교관 출신인 펠트먼 사무차장은 1986년부터 미 국무부에서 재직했으며 2004년부터 레바논 주재 미국 대사를 역임한 후 2012년 유엔으로 자리를 옮겼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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