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은 죽지 않았다. 사라지지도 않았다.
최근 노년 스타들이 스크린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쳐 갈채를 받고 있다. 열정이 있다면 나이 상관없이 누구나 영원한 현역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몸소 보여주고 있다.
“나의 친구 할머니들, 나 상 받았어요. 여러분들도 열심히 해서 각자의 자리에서 꼭 상 받으시길 바랍니다.” 지난달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영화 ‘아이 캔 스피크’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나문희의 소감은 뭉클한 감동을 안겼다. 공로상을 받고도 남을 관록과 나이(76세)에도 ‘경로 우대’가 아닌 현역으로서 당당히 거머쥔 여우주연상 트로피다. 더 서울어워즈와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까지 더해 두 달 사이 여우주연상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지난달 개봉한 ‘채비’의 고두심(66)과, 올해 ‘재심’ ‘희생부활자’ 두 편을 선보인 김해숙(62)도 빠질 수 없다. 시한부 삶을 남겨두고 발달장애 아들의 홀로서기를 가르치는 엄마로 분한 고두심은 다소 진부한 이야기에도 묵직한 연기로 관객을 울렸고, “엄마도 장르”라고 말하는 김해숙은 두 영화에서 모성애를 다채롭게 변주했다.
요즘 극장가에는 70세 백윤식이 있다. ‘반드시 잡는다’의 주연배우로, 현빈(‘꾼’) 강하늘 김무열(‘기억의 밤’) 등 젊은 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노인이 주인공인 범죄 스릴러 영화라는 독특한 시도에 백윤식은 몸을 아끼지 않은 액션 투혼을 바쳤다. 백윤식은 “배우 백윤식도, 인간 백윤식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며 열정을 내비친다.
주인공의 부모나 조부모가 아닌, 이름을 가진 주체적 노년 캐릭터의 잇따른 등장은 한국 영화의 다양성을 확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 관계자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고 있다. ‘아이 캔 스피크’를 제작한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남성 중심 서사에 대한 피로감과 여혐 논란 등으로 시끄러운 한국 영화계에서 노년 배우들의 활약은 그 자체로도 고무적이지만,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영화에 귀 기울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희망적이다”라고 평했다. 심 대표는 “봉준호 감독이 ‘괴물’의 변희봉, ‘마더’의 김혜자를 발견했던 것처럼 창작자들의 통찰과 깊이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노년 배우와 영화인, 그리고 그들이 만든 영화에 젊은 세대가 보여주는 환호에는 ‘진정한 어른’ 또는 ‘멘토’가 사라진 세태에 대한 안타까움이 투영돼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영화감독들의 단편영화 제작기를 담은 JTBC 예능프로그램 ‘전체관람가’에서 이명세(60) 감독이 40년 만에 연출한 단편 ‘그대 없이는 못 살아’를 본 후배 감독들은 눈물을 쏟았다. “영화란 대사 없이도 의도가 전달되는 움직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이 감독의 얘기에, 이경미(‘비밀은 없다’) 감독은 “패배주의에 젖어 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했고, 양익준(‘똥파리’) 감독은 “선배가 없던 영화계에서 영화를 만들었다”면서 멘토를 만난 감격에 벅차 올랐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연기력으로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올랐으면서도 겸손한 명배우 나문희의 미덕, 젊은 감독도 시도하지 못한 실험작을 만든 이명세 감독의 청년정신, tvN ‘윤식당’에서 보여준 윤여정의 소통 의지에서 젊은 세대는 자신들이 바라는 어른다운 어른의 모습을 찾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