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변 비리와 이권의 온상을 일컫는 ‘태머니 홀(Tammany Hall)’이란 말은 1788년 미국 뉴욕의 아일랜드 이민자 친목모임인 ‘세인트 태머니 소사이어티’에서 유래했다. 이민자 자립과 자선을 위해 시작된 모임이 당시 민주당 정치세력과 결탁하면서 19세기 중반 무렵엔 뉴욕 시와 주 행정을 장악할 만큼 비대해졌다. 그 부패의 주역이 ‘태머니 홀의 보스’ 윌리엄 트위드(William Tweed, 1823~1878)였다.
당시 뉴욕은 화재가 빈발했고 사설 소방대가 난립했다.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 사설 소방관 트위드는 불 끄는 일 못지 않게 경쟁 소방대원들과의 주먹질에 능했고, 카리스마와 보스 기질도 갖췄다고 한다. 그는 소방관 인기를 업고 1852년 뉴욕 주 하원의원에 당선, 태머니 홀의 중심부로 진입했고 58~71년 태머니 홀의 회장(Grand Sachem, 대족장)을 지냈다. 그 사이 주 상원의원(67년)에도 뽑혔다.
그의 시대는 뉴욕시가 외형적으로 급성장하던 때였다. 사회간접시설과 관공서 신축 등 관급공사가 줄을 이었다. 그는 그 모든 공사 계약에 개입, 막대한 이권을 챙겼다. 예컨대 맨해튼 챔버스가의 시 법원 신축공사는 당시 기준으로 300만달러 규모 사업이었지만 그를 거치며 1,300만달러 계약으로 부풀려졌다. 상수도 사업서부터 시청 문구 납품까지 그가 손대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였다. 상원의원이던 1868~70년의 2년여 사이 뉴욕시 채무는 3,600만달러에서 1억3,600만달러로 불어났다. 그는 뉴욕 3대 부동산 재벌이자 철도 호텔 은행을 장악한 거부가 됐고, 착복한 돈으로 공무원을 매수하며 태머니 홀의 무리를 이끌었다.
그는 1871년 11월 상원의원에 재선됐지만, 무리 중 한 명이 자기 몫에 불만을 품고 그의 비리를 뉴욕타임스에 제보함으로써 죄상이 드러났다. 73년 재판에서 그는 12년 형과 1만2,750달러 벌금형을 선고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1년으로 감형 받아 풀려났다. 75년 뉴욕 주가 횡령한 돈을 환수하기 위해 다시 소송을 걸었고, 보석금을 못내 구치소에 갇혔던 그는 그 해 12월 4일 탈옥해 쿠바를 거쳐 스페인으로 도피했다. 그는 신분을 감추고 부두 노동자로 일하다 76년 11월 강제 송환돼 78년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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