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자탑을 번쩍이던 애급 문명.” 여기에서 ‘금자탑’은 ‘피라미드’를 가리키는 말이다. ‘금자탑’을 ‘피라미드’의 대역어로 등재한 것은 로브샤이트(W. Lobscheid)의 ‘영화자전(英華字典ㆍ1866)’이 처음인데, 이런 사실로 보아 이 말은 중국에서 만들어져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왜 ‘피라미드’라는 원어의 소리를 흉내 내지도 않고, 이전의 번역어 ‘첨판체(尖瓣體)’를 마다하고, 굳이 새로운 번역어 ‘금자탑’을 만들어 쓴 것일까? ‘피라미드’의 모양을 나타내면서도 인상적인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일 터. 그러던 차에 피라미드의 모습이 한자 금(金)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누군가 새삼 깨달았을 것이고, 이런 맥락에서 금(金)자(字) 모양의 탑(塔)이라는 뜻의 ‘금자탑’이 탄생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이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때는 20세기 초로 짐작되는데, 1920년대 말까지 ‘금자탑’은 대부분 건축물 피라미드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그런데 1930년대에는 ‘금자탑’이 ‘후세에 남을 뛰어난 업적’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는 빈도가 높아졌다. 대부분 “조선 여성 교육에 금자탑을 쌓아 오늘의 25주년을 맞음에...”나 “우리 문화사의 찬란한 금자탑인 한글을...”과 같은 문맥에서 ‘금자탑’이란 말을 쓰다 보니, ‘금자탑’이 ‘피라미드’의 번역어라는 사실은 점점 언중의 뇌리에서 희미해져 갔다. ‘금자탑’을 막연히 ‘찬란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 말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금자탑’의 뜻을 ‘금으로 만든 탑’으로 생각하는 것도 ‘찬란한’과 ‘금’의 어울림 때문인 듯하다. 이젠 ‘금자탑’을 ‘금짜탑’이 아니라 ‘금자탑’이라 읽는다. 원어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지며 발음이 변했을 것이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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