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상륙 두 달 만에 2쇄 제작
1990년대를 지나온 사람은 안다. 파스타는 소개팅 푸드, 피자는 아빠가 끓인 짜파게티와 양대 산맥을 이룬 일요일의 패밀리 푸드였다는 것을. 이탈리아 음식은 그렇게 우리의 삶에 침투했다.
올가을 이탈리아 음식의 성서라 불리는 요리책이 한국에 상륙했다. ‘실버 스푼(The Silver Spoon·세미콜론)’. 1950년 출간돼 67년의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은 세계적 밀리언셀러다. 초판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레시피 몇 백 개를 모은 것이었다. 10번의 개정을 거치며 레시피가 소스부터 디저트까지 2,000여개로 늘었다. 몇 세대에 걸쳐 집집마다, 식당마다 이어져 내려온 검증된 레시피다. ‘할머니의 가지 그라탕’ ‘뱃사람식 홍합 요리’ ‘어부의 생선 수프’처럼 요리 이름이 곧 역사이자 정체성인 레시피가 많다. 친절한 책은 아니다. “현대 품종은 즙에 쓴맛이 없어 (예전처럼) 소금을 뿌려 30분간 물기를 걷어 낼 필요가 없다. 그래도 소금을 쓰면 맛이 더 섬세해지고, 흡수하는 기름 양이 줄어든다.”(가지 요리 편) 이처럼 식재료와 요리법의 원리를 알려 준다.
1,504쪽짜리 한국어 번역판의 무게는 3.2㎏. 번역에 2년이 걸렸다. 무쇠솥만큼 무거운 9만9,000원짜리 책이 출간 두 달 만에 3,000부 가까이 팔려 2쇄를 찍고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인쇄한다니, 책 자체가 ‘이태리제’다.
주한 이탈리아 문화원은 최근 서울 한남동 이탈리아 대사관저에서 ‘실버 스푼’ 출판 기념회를 열었다. 이탈리아 정부가 나선 건 이탈리아인이 이 책을 그만큼 자랑스러워한다는 뜻이다. 은수저를 뜻하는 원저 제목 ‘일 쿠치아니오 다르젠토(Il Cucchianio d’argento)’는 ‘상속받은 유산’이라는 의미의 관용어. ‘음식과 레시피는 곧 이탈리아 문화의 정수’라는 의미가 담겼다.
행사에서 만난 셰프들은 실버 스푼에 얽힌 얘기들을 풀어 놨다. “‘실버 스푼’을 처음 본 건 6세 때인 1970년대 초 피에몬테의 할머니집에서였다. 할머니는 책을 서재에 꽂아 두고 아꼈다. 음식물이 튀면 안 된다며 부엌에는 갖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레시피를 종이에 옮겨 적어 사용했다. 아버지도 ‘실버 스푼’을 보고 요리를 만들었다. 지금은 내 책장에 꽂혀 있다. 놓친 게 있을까 싶어 종종 책을 펴 본다.”(서울 한남동 ‘파올로 데 마리아 파인 트라토리아’의 파올로 데 마리아 셰프) “셰프가 되려 훈련할 때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나 답을 알려 준 든든한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이탈리아어 사전 찾아 가며 봤는데, 번역본이 나왔다는 소식에 바로 서점에 달려가 샀다. 초대 받아 이탈리아 현지인 집에 가면 책 레시피 대로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경우가 많다. 김치 담그듯, 이탈리아에선 1년 내내 쓸 토마토 소스를 6월쯤 만들어 둔다. 토마토 소스 레시피는 차고 넘치지만, 김치 레시피는 별로 없어 아쉽다.”(서울 통인동 ‘갈리나 데이지’ 박누리 셰프)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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