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엔 제사가 신앙의 중심
읽지 못해도 이야기, 노래로 들어
바빌론 유수 후 ‘말씀’이 신앙 핵심
인쇄술 발전 100여년 전 성경 대중화
구약성경의 유명한 인물들인 모세나 아브라함, 다윗도 지금의 신앙인들처럼 성서를 열심히 읽었을까. 춘향이가 ‘춘향전’을 읽었을까 묻는 것과 같은 우매한 질문이다. 춘향이는 ‘춘향전’ 말고 다른 책이라도 읽었겠지만, 저분들은 책 한 권 가지기도 어려웠었다.
당시의 책은 소위 ‘태블릿(tablet)’이었는데 디지털 방식의 요즘 것과는 매우 다른 어쿠스틱 방식의 수제품이었다. 진흙이 마르기 전 뾰족한 나무나 철심으로 문자를 찍어 넣거나, 딱딱한 표면을 긁어서 적어 넣었던 돌판이 그들의 책이었던 것이다. 한권 만들기도 힘들었기에 남에게 읽으라고 빌려주는 건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 유명한 십계명은 두 개의 돌판에 적힌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하나님이 직접 손가락으로 돌에 새겨 넣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십계명을 담은 상자인 언약궤는 누가 함부로 열어보지도 못했다.
좀 사정이 나아졌을 때에는 짐승의 가죽이나 파피루스라는 종이에 잉크로 글을 적기도 했다. 인쇄기가 없던 때라 책을 보급하려면 서기관이라는 ‘인간 복사기’가 필요했는데, 한 자 한 자 그대로 베껴 적어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선생쯤 되시는 분들은 직접 펜을 들지 않으셨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신학자 바울도 자기 아래에 있는 문하생이 대신 받아 적었다. 예수님도 자신이 직접 적으신 문헌은 없는데, 어느 날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적으셨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있다. 적으신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적은 후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그 덕에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 하나가 목숨을 건졌다. 공교롭게도 십계명을 적으신 하나님도, 땅바닥에 무언가를 적으신 예수님도 필기도구는 모두 ‘손가락’이었다.
성경이 없던 시대, 신앙의 중심은 제사
기독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계시라고 여겨지기에 신앙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없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성경이 아닌 ‘제의(祭儀)’가 신앙의 중심이었다. 당시에 신앙이 강하기로 유명했던 사람이 욥인데, 그는 심지어 자기 자식들을 위한 제사를 그 명수대로 일일이 다 드렸다고 한다. 성경이 없으니 아담과 이브 이야기나 노아 홍수 이야기 같은 걸 그들은 전혀 몰랐을까?
아니다. 읽지는 못했어도 들을 수는 있었다. 인류가 귀중한 정보를 ‘문헌’으로 보존하기 전에는 주로 ‘이야기’나 ‘노래’로 남겼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보면, 유랑시인이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노래로 소식을 전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중요한 정보는 이야기로 만들고 노래로 불렀다. 멜로디와 리듬을 얹으면 외우기가 쉬어 정보가 안전하게 보존되기 때문이다.
귀한 정보를 좀 더 확실히 전수하기 위해 그들은 가정의 구두 문답 교육을 권장했다. “나중에 당신들의 자녀가,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명하신 훈령과 규례와 법도가 무엇이냐고 당신들에게 묻거든, 당신들은 자녀에게 이렇게 일러주십시오.” (신명기 6:20-21; 새번역) 그래서 당시에는 소중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도서관이나 인터넷 검색 대신 부모와 어르신의 기억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책이 없었기에 어른 세대의 경험은 귀중했던 것이다. 책이 있었으면 밑줄을 쫙 쳐서 강조해야 할 것을 그때는 다음과 같이 하였다. “또 당신들은 그것을 (가르침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 (신명기 6:7-9)
그러다가 제의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 성전이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론 침공으로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포로로 살아야만 했다. 제의를 드릴 수 없게 되자 자연스럽게 그들 신앙의 핵심은 ‘말씀’으로 옮겨졌다. 하나님을 꼭 특정한 장소에 가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성전이 없다 하더라도 삼삼오오 모여 하나님이 모세에게 전달하신 율법 책을 펼쳐 읽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큰 신학적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처소에서 글로, 제의에서 말씀으로, 형이하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진보한 것이다.
모세와 솔로몬, 끊임없이 뭔가 적었다
포로가 되기 전 성서의 내용이 전혀 글로써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여전히 구두전승으로 떠돌아 다녔던 것이 많았지만, 단편적이고 분절적인 형태의 문헌이 분명 회람되었었다. 당시에 ‘무엇을 적었던 것’으로 유명했던 분은 모세다. 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일컫는 ‘오경’을 보면 모세가 무언가를 적었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오경의 저자를 모세로 여겼다. 물론 그가 적었던 것이 지금의 오경과 똑같을 리는 없지만, ‘저작권’은 인정해 드릴 수 있다.
무엇을 적었던 것으로 유명한 또 다른 분은 솔로몬 왕이다. 아버지 다윗 덕으로 막강한 국력을 이어 받았기에 그는 풍요롭게 나라의 문예중흥을 꾀하였다. 자기가 직접 산천초목을 관찰하면서 많은 글을 적었다고 한다. 성경의 초석이 되었던 문헌들이 잘살던 다윗과 솔로몬 때, 즉 기원전 10세기 즈음에 많이 형성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약 50년간의 포로기가 끝나고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그때에 오경의 핵심인 율법서가 꽤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지도자였던 에스라는 이 율법서를 가지고 역사상 최초의 ‘성경공부’를 하였다. “백성들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에, 그들에게 율법을 설명하여 주었다. 하나님의 율법책이 낭독될 때에, 그들이 통역을 하고 뜻을 밝혀 설명하여 주었으므로, 백성은 내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백성은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모두 울었다.” (느헤미야 8:7-9)
성경 읽고 공부하기, 20세기에야 가능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기원후 1세기, 예수님이 사시던 유대 사회에는 자기들의 성경이 나름 완성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도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토론도 하셨다. 예수가 돌아가신 후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예수 운동이 일어나는데, 모두 유대교인이었지만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 기독교를 탄생시킨다. 이 기독교가 유대교의 성경을 ‘옛 언약’이란 뜻의 ‘구약’이라 명명했고, 예수 운동과 함께 형성된 책들을 모아 ‘새 언약’이란 뜻의 ‘신약’이라 부른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성경은 쉽게 접할 수 없던 책이었다. 거의 15세기가 흐른 뒤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기를 발명하여 놀라운 양의 책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전까지는, 성경을 눈앞에 두고 공부하던 일이 매우 드물었다. 대중이 성경을 자유롭게 읽고 열띠게 공부하는 시기는 거의 20세기가 되어서야 가능했으니, 인류의 성경공부 역사는 사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인류는 오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읽기보다는 귀로 들어왔던 것이다.
읽는 것과 듣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활자는 고정되어 있기에 우리는 읽을 때에 앞뒤로 살펴보며 분석하고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낭독을 듣는 것은 일종의 퍼포먼스를 감상하는 것과 같다. 어떤 책을 라디오 디제이가 청취자들을 위해 나지막이 읽어 주는 것을 생각해 보시면 된다. 여기에는 ‘깨달음’보다는 ‘감화’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유럽의 고전적인 교회에서는 성경의 본문을 그저 담담하게 낭독하는 의례가 예배의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회당에서 읽으셨다는 성경구절이 나와 있다. 성경의 수많은 구절 중 예수께서 읽으신 것이라니,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일 것이 분명하다. 이사야서 58장 6절과 61장 1-2절을 읽으신 것인데, 감화가 함께 하길 바라며.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누가복음 4:18-19; 가톨릭 성경)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