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 협상 실패로 정치적 기로에 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재선거 가능성을 내비쳤다. 소속 기독민주ㆍ기독사회당(CDUㆍCSU) 연합과 자유민주당, 녹색당의 연정 협상이 결렬되자, 과반에 못 미치는 소수정부를 출범시켜 불안정성을 키우기보다는 재선거를 택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거꾸로 제1당 지위마저 잃을 수 있어 ‘모 아니면 도’ 식의 승부수로 읽히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20일(현지시간) 공영방송 ARD와 인터뷰에서 소수정부 출범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라며 “새로운 선거가 더 나은 길일 수 있다”고 밝혔다. 전날 자유민주당이 난민 문제 등에 대한 입장 차이로 협상을 포기한 후 메르켈 총리가 녹색당과 소수정부를 구성할 가능성도 제기됐으나 이를 단칼에 거부한 것이다. 그는 이날 다른 인터뷰에서 “독일은 안정성이 필요하다”고 결정 이유도 밝혔다.
메르켈 총리의 발언은 정치적 위기 국면에서 흔들리는 리더십을 붙잡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시행 단계에 이르지 않더라도 ‘재선거도 불사하겠다’는 자세로 정치권을 압박해 연정 재협상을 노려볼 수도 있다. 실제 이날 오전 메르켈 총리와 면담했던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별도의 연설을 통해 “재선거를 요구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모든 정당이 책임감을 갖고 타협에 나서길 바라며 각 당 대표들과 21일부터 대화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독일 기본법(헌법) 상 의회해산권 등 재선거 추진을 위한 필수 권한을 갖고 있다. 즉 메르켈 총리가 아무리 재선거를 원해도 대통령이 거부할 경우 이뤄지지 못한다.
재협상 전략이 실패한 채 재선거가 실현될 경우 메르켈 총리에겐 결코 쉽지 않은 길이 펼쳐질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재선거가 실시될 경우 기성 정치권에 대한 염증과 연정 협상 실패에 대한 책임론으로 인해 기성 정당은 부진하고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AfD)만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다. 이를 방증하듯 알렉산더 가울란트와 알리체 바이델 AfD 공동 원내대표는 “메르켈은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라며 현 상황에 환영의 뜻을 표했다.
재선거 결과가 지난 9월 총선과 유사해도 다시 같은 절차를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 RTL 방송이 이날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CDUㆍCSU 연합과 AfD를 비롯한 주요 정당의 지지율은 총선 결과와 각 0.2~0.3%포인트 차이가 날 뿐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재선거의 실효성을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또다시 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은 막대하다. 독일 헌법에 따르면 재선거 전 연방의회에서 총리가 새로 선출돼야 하는데, 대통령이 후보를 제안한 후 의회 내 과반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새 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연방의회를 해산하면 60일 이내에 재선거를 실시한다.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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