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로 확정됐다. 유권자 1,567만6,395명 중 1,428만6,355명(91.9%)이 투표해 92.2%가 찬성했다고 당시 공보처가 발표했다.(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자료)
71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40대 기수론의 김대중 후보에게 94만여 표 차이로 신승했다. 조직적 선거부정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경기, 전남ㆍ북에서는 패배했다. 한 달 뒤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여당 민주공화당은 113석(7대국회 117석)이었으나 신민당은 89석(7대 37석)이 됐다. 서울에서 공화당은 단 1석(신민당 18석)을 얻는 데 그쳤고, 부산에서도 2석(신민당 6석)으로 대패했다. 두 당의 득표율은 각각 48.8%와 44.4%였다.
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종신집권을 위해 기획한 친위쿠데타가 유신이었다. 이듬해 10월 17일, 그는 대통령 특별선언을 통해 비상조치를 선포했다. 국회 해산 및 정당ㆍ정치활동 중지와 헌법개정 선언이었다. 다음날 계엄령으로 집회ㆍ시위를 금지했고, 언론 사전검열 및 대학 휴교, 유언비어 날조ㆍ유포 금지를 명했다. 명분은 ‘남침야욕 저지와 통일’이었다. 71년 미ㆍ중 핑퐁외교와 72년 닉슨의 중국(중공) 방문 등은 안보 위기론의 호재이기도 했다. 10월 27일 국회 권한을 대행한 비상국무회의는 헌법안을 의결ㆍ공고했고, 21일 국민투표가 이뤄졌다.
유신헌법(제7차 개정헌법)은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신설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간접선거로 뽑도록 했다. 임기 6년에 연임제한을 철폐했고, 국회해산권과 헌법 효력 정지권한(긴급조치권), 법관 임명권을 부여했다. 국회의원 1/3도 대통령이 추천해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토록 했다. 한마디로 헌법과 3권 위에 군림하는 종신 총통이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모든 정부 기관이, 계엄 하의 언론이, 유신만이 북한의 남침 야욕을 분쇄하고 안보와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선전했다.
유신헌법 국민투표는 물론 살벌한 계엄 하에서 부정하게 치러졌지만 쉽게 수긍하기 힘든 결과를 낳았고 유신체제의 국가폭력의 길이 그렇게 열렸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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