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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힘내라 99년생들아!

입력
2017.11.20 20: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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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진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그건 평면 스크린으로 봐 오던 영화 속 재난 장면이 아니다. 온 몸으로 전해오는 흔들림. 주변이 꽈배기처럼 뒤틀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라고 깨닫는 순간의 무력감. 지진은 그래서 무섭다.

2011년 3월 일본 도호쿠(東北) 대지진 때 취재차 만난 사람들 표정에서 그걸 여실히 느꼈다. 상대가 불가한 절대 강자에게 일방적으로 당했을 때나 보일 처참함.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살아남았으니 됐습니다”라고 안도하는 사람들 얼굴엔 지옥에서 간신히 탈출한 듯한 공포가 가득했다. 피해 현장과 대피소를 들르면서 쓴 취재수첩에는 “죽을 거 같다”, “춥고 아프다”라는 아우성이 빼곡했다. “집도 가족도. 모든 걸 잃었어요”라고 울먹이던 70대 노인을 만나고 있을 땐, 땅이 여러 번 흔들렸다.

그땐 내가 사는 대한민국에서 지진을 경험할 일은 영영 없을 줄 알았다.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 표정과 폐허는 그저 무용담처럼 전해졌다. “3등분한 삼각김밥이랑 바나나를 주는데 일본 사람들 불평 한 마디 안 해요.” “새치기 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도 없을까요. 일본 사람들 대단해요.”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1년 전 경주에서, 며칠 전 포항에서 일어난 지진은 놀라웠다. 진앙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에서도 흔들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규모 5.0이 넘는, 국내에서는 1978년 관측이 시작된 이후 몇 손가락 안에 꼽아줄 ‘센 놈’이었다. 당장 포항에서는 멀쩡했던 아파트가 기울어지고, 벽에 금이 갔다. 대비하지 못한 지진의 타격에 도시는 무너졌다. 며칠 째 계속되는 여진에 수백 명 시민들은 지금도 대피소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그것보다 규모가 약하고 피해도 다행히 적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지진은 지진. 제일 센 놈한테 맞으나, 그 다음 센 놈한테 맞으나 아픈 건 매한가지다.

놀란 건 나만이 아니었다. 인터넷에는 지진을 전하는 언론보도 아래로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다. 격려와 연민이 담긴 글이 대부분이었지만,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도 꽤나 많았다. “지진 좀 난 것 가지고 왜 이리 호들갑인지 모르겠다”는 투. 역시나 공감 능력이 부족한 건가.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지금 그 것보다 더 큰 일 겪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 제발 죽는 소리 좀 그만하지 그래.” 갑갑한 일이다.

좀 더 심한 말도 있다. “문재인 정부에 하늘이 주는 준엄한 경고다.” 다툼은 있지만, 제1야당의 ‘최고’위원이 했다는 말이다. 이런 것도 있다. “종교계에 과세 문(한)다니까 지진이 났다. 하나님을 건드릴 때 국가에 위기가 다가오는 거다.” 한 교회 목사가 설파한 내용이다. 지진이 하늘이 내린 천벌이라는, 가뭄과 홍수가 왕 때문이라는, 세상을 참 편히 해석하는 중세시대의 눈과 입이다.

며칠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불쌍한 99년생’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초등학생 때 신종플루, 중학생 때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고등학생 때 세월호 참사로 수학여행 한 번 못 가보고 공부했는데, 마무리가 수능 연기’라는 자조였다. 웃기면서도, 따지고 보면 저게 다 누구 탓인데 싶어 미안했다.

그런 99년생들에게 부탁 하나 해야겠다. 다행스럽게도 수능 연기 결정을 두고는 옳다는 시각이 많다. 다수(전국 수험생)가 아닌 힘들고 불안한 소수(포항 수험생)를 위해 내려진 ‘같이 사는 세상에 내려질 마땅한 결정’이었다고 많은 이들은 박수를 보내고 있다.

그래서 그 99년생들이 이번 수능에서 제발 좋은 성적을 거뒀으면 한다. 정치 공세에 써먹고, 집단 이기에 이용하는 못된 어른들에게 지진이, 수능 연기가 별 거 아니었다고 본때를 보여줬으면 한다. 이제 이틀 남았다. 힘내자 99년생들아.

남상욱 사회부 기자 thot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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