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출근 시간대를 벗어난 버스는 느릿느릿 킨카쿠지(金閣寺)를 향하고 있다. 텅 빈 버스만큼 텅 빈 현지인의 표정을 실어다 나른다. 누군가 우리의 표정을 보면 어떠할까. 그 표정은 집도 절도 없는 여행자의 허무함보다는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세상을 반으로 접은 수채화, 킨카쿠지
“여기서 찍자.” “아니야, 저기 저쪽으로!” “사진 좀 찍어주겠어요?”
지구 이곳 저곳에서 원정 온 관광객이 연 포문이다. 킨카쿠지를 들어서자마자 이 삼박자 문장은 반복의 미학을 거듭하고 있다. 여기는 화제의 금빛 누각(킨카쿠) 앞. ‘혹시 가짜 아냐?’ 불경한 첫인상이었다. 흠 없는 금빛 슈트를 입은 듯 인위적인 연유다. 킨카쿠는 태양 아래 스스로 발현할 수 있는 온갖 폼을 다 재고 있다. 짙푸른 고목과 누각은 구름까지 끌어 모아 연못에 툭 쓰러졌다. 부표처럼 띄워진 키 작은 소나무만 꼿꼿하다. 사진 명당을 차지하려는 이기적인 사람도 연못에 비치니 신선 수준이다. 우리의 감정을 도매금으로 넘기고 싶진 않았지만, 그랬다. 세상을 반으로 접어 찍어낸 신기루가 그곳에 있었다.
킨카쿠지는 1397년경 무사와 귀족을 주무르는 타고난 정치인 아시카가 요시미쓰 쇼군이 노후를 위해 설계한 별장이다. 죽음을 권력으로 이길 수 없던 그는 청했다. “‘로쿠온지’란 선종 사찰로 후대에 넘기오.” 권력자로부터 태생했기에, 그 힘이 제법 남았다. 초입부터 하이라이트를 덜컥 내놓는 심보만 봐도 과감하고 남성스럽다. 덕분에 김 샐 법도 하지만 킨카쿠지는 이런저런 잔재미를 뒷산으로 미뤄놨다. 야트막한 폭포와 연못, 이를 아우르는 이끼와 침염수림이 그 친구다. 사실 킨카쿠지가 더욱 돋보이는 건 뒷산의 셋카테이(夕佳亭) 덕이 크다. 이 17세기 다실은 낮고 작고 수수하다. 이곳에 앉아 내려다본 킨카쿠는 지붕의 봉황과 함께 승천할 기세다. 쇼군은 이곳이 극락정토(極樂淨土)이길 바란다고 했었던가. 보지 못했으니 극락은 몰라도, 호흡은 제법 가늘어졌다.
돌 불상에 동전을 던지며 수학여행의 기분을 만끽하는 무리를 지나 발목을 잡은 건 후문의 운세풀이 박스다. 영어와 중국어, 한국어까지 친절하다. 100엔을 넣었다. 이건 뭐 무병장수 수준이다. 옆 커플의 운세도 같지 않을까 훔쳐볼까 했지만, 인생은 때론 속으면서 사는 게 속 편하다. 바쁜 걸음이기에 뒤로한 것도 많았다. 쇼군이 대접받았을 다실의 차 한잔도, 이에 끼면 행운일 금싸라기가 뿌려질 소프트아이스크림도.
기묘한 침묵과 평안의 수묵화, 료안지(龍安寺)
발길을 돌릴까도 생각했다. 료안지의 대표 이미지는 돌덩어리 몇 개뿐이었다. 이게 정원이라고? 감정도, 감상도 없다. 지난 1975년 방문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극찬했다는 혜안을 알 길 없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감투만 믿고 나서는 길, 킨카쿠지에서 ‘기누카케노미치’ 산책로의 풀잎이 진해질 때쯤 료안지에 닿는다.
료안지는 입구부터 하나의 원 같다. 입구도 출구도 끝도 없는 원이다. 오솔길을 곁에 둔 너그러운 교요치(鏡容池) 연못과 제법 오르락내리락하는 돌길 계단이 이어지지만, 원으로 묶인 또 하나의 시공간이다. 갇혔지만 탁 트여 있고, 결국엔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 원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고요한 바람과 나무숲이 인도하는 가운데, 원의 중심엔 언제나 나 자신이 선 기분이다.
의문의 돌 정원인 본당 석정(石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돌과 모래로만 산수를 표현했다는 ‘카레산스이 양식’을 두 눈으로 확인하러 가는 길, 애꿎은 까치발이다. 본당의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에 금새 날 들켜버린다. 기묘한 침묵이었다. 관광객 모두 어디로 달아나 버렸나? 아니다. 대신 석정 앞 툇마루에 박제되어 있다. 말수와 움직임이 줄고, 행동의 무례함도 사라졌다. 그들이 몰입한 풍경은 사진 속에서 튀어나온 눈앞의 정원석이다. 키도 몸집도 다른 15개의 돌은 5개로 무리 짓고 뚝뚝 떨어져 곱게 빚은 자갈 원 안에 모셔져 있다. 일시 정지해 죽은 듯한 풍경은 아니다. 돌 결엔 그림자가 얌전히 드리우고, 담장 뒤로 키 높은 나무들이 삭-삭- 생명의 코러스를 불어넣는다. 돌인가, 나 자신의 투영인가. 카레산스이 양식의 정원은 깨달음을 위한 수련의 장이라고도 했다. 확실한 건 모두 비웠기에 흐뭇한 얼굴이지만, 하얀 이를 드러내진 않았다. 젠 스타일의 사찰이 가르쳐준 지독한 절제였다.
또 다른 명상은 바로 뒤 처소인 방장(方丈)에서도 가능하다. 미세한 붓의 힘으로 조절한 다른 산수가 그곳에 있다. 건축과 그림, 그리고 사람이 하나로 소통한다. 세월의 습기를 먹은 천장과 섬세한 다다미 방바닥 사이를 미닫이문의 수묵화가 잇는다. 기웃거리는 사람마저 그림처럼 걸린다. 허리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고 오래 보아도 온전히 담지 못할 풍경이다. 이 역시 인간이 터무니없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일깨우는 참선일까. 료안지를 세운 호소카와 카츠모토는 칼부림 뒤에 깊은 자기 성찰을 했던 무사였던 게 분명했다.
먼 길처럼 교요치(鏡容池) 연못을 빙 둘러 나왔다. 색의 대조가 선명한 날씨였건만 왠지 모르겠다. 이곳은 먹의 힘이 그려나간 한 편의 수묵화로만 기억된다. 번뇌조차 공치사로 느껴졌다면 과장일까. 버스라는 문명의 이기에 오르니, 차창에 비친 우리 표정이 텅 비어있다. 오전에 본 일본인의 표정도 이랬던 건지 모르겠다. 대책 없이 우린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다음 편은 교토의 동쪽으로 굽이굽이 갑니다.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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