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1.14~1926.12.5)는 대상 자체에 대한 앎(지식과 선입견)을 넘어선 자리에서 그림이 시작된다고 여겼다. 오브제와 캔버스 사이에 그 무엇도 개입하지 못하게 하려는 고집. “나무든 집이든 들판이든 뭐든, 다 잊고 직관하는 거다. ‘아, 작고 푸르스름한 사각형이 있네, 이건 장방형의 분홍빛, 저건 노란색 줄무늬 같은 걸’ 그렇게 보이는 그대로, 최대한 정확한 색과 형태로 구현하는 것. 그래서, 눈 앞의 풍경이 주는 인상(impression)이 그림에 재현되도록 해야 한다.”
모네 마네 르누아르 등 그들 ‘인상파’를 빛의 예술가라 하는 까닭도, 빛이 드러내고 강조하고 뭉개고 지우는 선과 색을, 물(物) 자체보다 중시해서였다. 빛의 변덕을 포착하려면 강렬한 인상을 기억해야 하고 수시로 달라져가는 대상에 현혹되지 않아야 했다. 그들은 오래 응시해 망막과 기억에 새긴 인상을 유지하기 위해 자주 눈을 감아야 했을 것이다.
청력을 잃은 베토벤이 피아노소나타와 교향곡(9번)을 작곡했듯이,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 사물의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지경이었던 말년의 모네도 숨지기 1년 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서리 앉은 듯 흐려진 수정체는 그에게 새로운 빛과 형체를 망막에 영사했고, 그는 오브제의 선들을 잃어버린, 오직 난반사하는 빛과 색으로 남은 수련을 그렸다. 사실주의를 넘어선 그의 작품은 그렇게 현대 추상회화로 이어지는 길 하나를 열었다.
1874년 파리의 한 사진작가 스튜디오에서 연 모네 등의 전시회에 루이 르루아(Louis Leroy)라는 비평가가 르누아르 모네 세잔 등의 그림에 조롱에 가까운 혹평을 했고, 특히 모네의 ‘인상, 해돋이’(1872)를 두고 제목처럼 인상만 그렸을 뿐이라고, “그리다 만 벽지보다 못하다”고 쓰면서, 인상파란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모네는 선박부품상이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꽤 풍족하게 살았지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델이자 뮤즈였던 까미유와 결혼한 뒤 원조가 끊겨 힘들게 살았다. 저런 혹평 속에 그림도 잘 팔리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의 그림은 점차 인기를 얻어 중년 이후 그는 지베르니의 저택을 살 만큼 부자가 됐다. 그는 “사람들은 내 그림 앞에서 토론하며 마치 이해하는 척하곤 한다. 그냥 사랑하면 되는데, 이해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라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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