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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지구에 그리는 그림

입력
2017.11.09 11:2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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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톱을 깎다가 물끄러미 내 발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의 발은 참 신기하다. 작은 발에 발가락이 10개나 붙어있다. 뭐가 저렇게 많이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건을 집거나 기구를 다루는 것에 알맞게 만들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걷는 것’만큼은 용이하게 만들어져 있다. 발은 걷는 순간 본래의 역할을 시작한다. 많이 걸어야지 하면서도 그게 잘 안 된다. 건강을 위해 하루에 1만보 이상 걷겠다고 다짐하고 스마트폰에 만보계 앱을 깔았지만 날마다 붉은 색의 막대만 늘어난다. 차를 가져가면 심지어 200보가 안 되는 날도 있다.

인간은 직립보행한 이후부터 쭉 걷고 또 걸었다. 인간의 걷기는 길을 만든다. 우리가 걷는 길,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인간이 걸으며 만들어져 온 결과다. 사람의 두 발이 지구 위에 수없이 많은 길을 만들어 버렸다. 마치 인간이 지구에 그려놓은 그림이나 조각 같다.

그런 길 중 하나가 없어져 버렸다. 한 달 만에 강화도를 다시 갔더니 걷기 좋은 길이 하나 사라지고 없었다. 낮은 돌담 너머로 한옥이 보이던 예쁜 길이었는데, 이제 그때 사진으로만 남게 되었다. 20년 전 도로로 계획되어 묶여있던 지역이 해제시점이 다가오자 하루빨리 도로로 만들어달라며 청원한 결과라고 한다. 작은 도시에 넓은 도로를 만드는 게 뭐가 그리 급했는지 오래된 집 몇 채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이 다니던 길이 사라지고 자동차나 다니게 되겠지…라며 불평을 늘어놓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변화가 빠른 대도시 서울과 멀리 떨어져있다 해서 더 많이 남아있는 건 아닌 것이다. 훌륭한 건축 자산이 또 사라져 버렸다.

길을 건축자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러하다. 사람들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만들어낸 훌륭한 건축자산인 것이다.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고, 집과 집을 연결하는 것이 길이다. 한번 난 길은 없애기 어렵다. 길이 생겼다는 것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흐름이라는 뜻이다. 잘 닦인 등산로에도 사람이 밟아서 생긴 샛길들이 있고, 공원 안에 잘 조성된 보행로가 있어도 분명 옆으로 새어나간 길들이 있다. 그런 길은 아무리 막아도 다시 생긴다. 사람의 행동에서 필요한 길이기 때문이다. 건물은 없어지고 다시 세워질 수 있지만 길은 대부분 계속 존재한다. 그래서 길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된다. 길을 국가가 관리하며 개인의 맘대로 바꿀 수 없도록 한 것은 이런 이유이다. 길은 여러 사람들이 같이 사용하는 ‘공공재’ 다.

한때 광풍처럼 몰아쳤던 ‘뉴타운’식 재건축은 서울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기존 건물과 길을 다 밀어버리고 새로운 단지를 건설하는 무지막지한 방식이었다. 불가역적이고 폭력적인 변화는 많은 상처를 남겼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오랫동안 밟고 다닌 길을 밀어버린 것이었다. 자유롭게 관통하는 길 대신 입주자만 출입할 수 있는 단지가 생겨났으니 자유롭고 원활한 소통이 일어날 수 있을까.

잊혀진 길을 느끼고 싶다면 옛 돈의문 자리에 세워진 돈의문박물관마을에 한번 가보기를 권한다. 두 달 동안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가 열린 주요 전시장 중 하나로, 1900년대 초부터 말까지 서른 채 정도의 다양한 건물들이 남아있다. 건물 안에 전시된 작품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의미 있지만, 그것이 없더라도 이 마을 자체가 전시작품 같은 곳이다. 그래서 이름도 박물관마을이다. 집만 남아있는 게 아니라, 집과 집 사이에 형성된 길도 남아 있어서 좋다. 한옥부터 일본식 가옥, 근대양옥 등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뒤섞인 꼬불꼬불 골목길을 걷다 보면 우리 도시의 아름다움과 재미란 바로 이런 것이지, 하고 환호하지 않을 수 없다.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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