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단 한 번뿐인 정원 재배정
접수 받는 병무청 팩스도 단 1대
스타트업 팩스 신호음에 웃고 울고
“요즘 시대에 팩스가 말이 되나”
뚜뚜뚜, 뚜뚜뚜…
서울 강남구 한 스타트업 인사담당자 A씨는 8일 오전 10시 회사가 아닌 집 근처 팩스기가 있는 복사업체로 출근했다. 이날은 서울병무청 관할 내 산업기능요원(중소기업 근무로 군복무 대체) 43명 정원에 대한 재배정을 하는 날. 일부 반납된 산업기능요원 선발 정원을 일정 자격증을 갖춘 현역 대상자가 속한 병역지정업체에 다시 배분하는 것인데, 그 방식이 선착순이다. 오전 10시부터 단 하나의 팩스기기로 이뤄졌다.
A씨 회사에는 지방의 한 유명 공과대학 휴학생인 개발자 B씨(현역대상자)가 있는데 산업기능요원이 되면 B씨가 군대에 가지 않고 2년 10개월(현역 기준 산업기능요원 복무 기간)간 이 회사에서 더 일할 수 있다. 개발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스타트업 입장에선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A싸를 포함해 회사 전 직원 50여명이 달라붙어 1시간 가까이 팩스와 씨름을 했지만 통화 중임을 알리는 신호음뿐. 결국 서류 전송에 실패했다. A씨는 “1년 후 다시 시도하겠지만 그 때까지 고급 인력인 B씨가 회사를 계속 다닐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이날 오전 1년에 한 번뿐인 산업기능요원 재배정 접수에 스타트업들 관계자들이 팩스기기 앞에 장사진을 이뤘다. 능력과 경력을 갖춘 개발자는 워낙 주가가 높아 자금력이 탄탄하지 못한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고용과 유지가 어렵다. 때문에 병역지정업체인 일부 스타트업들은 ‘미필’인 주요 대학 휴학생 개발자를 우선 고용한 뒤 산업기능요원 정원 배정을 받아 이들을 산업기능요원으로 편입시키길 희망한다. 이렇게 되면 개발자들로서는 회사 근무로 군복무를 대체하면서도 신입 초임 수준의 급여와 경험을 얻게 되며, 회사로서는 고급 인재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에 일정 기간 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병무청이 달랑 팩스 하나로 접수를 받는 탓에 전 임직원이 달라붙어도 허탕을 치기 일쑤다. 서울 종로구의 한 스타트업 회사 역시 미필 개발자를 위해 40여명 임직원이 달려들어 접수를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일부 스타트업들은 아예 팩스기기를 빌리거나,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서류 접수를 시도하기도 했다. 업체들 모두 “요즘 같은 시대에 팩스기기가 말이 되나“라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접수 시작 1시간만인 오전 11시께 43명 정원이 채워졌다. 병무청 관계자는 “워낙 접수가 몰리는데다 팩스기기가 수신된 시간을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에 이 방식을 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현상은 5년 전 국방부가 산업기능요원 제도를 폐지ㆍ축소하면서 생겼다. 애초 국방부는 중소기업 인력난 해결을 위해 산업기능요원 복무 후에도 해당 업체에 남아 일하기를 기대했지만, 상당수 대학생들은 소집해제 뒤 기업을 떠났다. 이에 국방부는 2012년부터 현역대상자 중 특성화고, 마이스터고, 실업계고 출신 등 취업 의지가 강한 고졸자만을 산업기능요원으로 배정했다. 올해 이런 산업기능요원 정원은 6,000명. 이중 업체가 경영상 사유로 배정 인원을 반납하면 병무청이 지역별로 모인 수 십여명의 결원을 매년 10, 11월 희망 업체에 재배정하는데, 이때는 대학 재학생도 산업기능요원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미필 대학생으로서는 재배정이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된 것이다. 벤처기업협회 관계자는 “고급 개발자 확보가 어려운 탓에 이 같은 재배정에 IT 관련 스타트업들이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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