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 재미없다”는 옛말
남성 영화에 쏠린 국내 영화계
소외된 관객 수요에 흥행 성과
‘너의 췌장을…’ 40만 돌파 눈앞
日대표 감독 영화 개봉 잇달아
최근 극장가에 일본 영화들이 대거 쏟아지며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단지 개봉작 편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한국 영화 화제작과 미국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틈바구니에서 폭발적이지는 않지만 유의미한 흥행 성과를 거두고 있어 눈길을 끈다.
지난달 25일 개봉한 일본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3주째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지키며 7일까지 36만 관객을 불러모았다. 올해 개봉한 다양성 영화 중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2편(‘터닝메카드W: 블랙미러의 부활’ㆍ‘눈의 여왕3: 눈과 불의 마법대결’)을 제외하고 최다 관객이다. 이 영화는 췌장암에 걸린 시한부 소녀와 친구를 만들지 않는 외톨이 소년의 비밀스러운 추억을 아름다운 영상에 담은 청춘 멜로물이다. 살벌한 제목과는 달리 삶을 성찰하는, 제법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어 관객의 호응을 얻었다.
판타지 멜로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와 직장인의 애환을 그린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도 각각 누적관객수 17만명과 3만4,000명을 기록하며 선전했다. 두 영화는 각각 지난달 12일과 19일 개봉해 비록 적은 스크린이지만 한 달 가까이 관객을 만나고 있다.
일본 대표 감독들의 영화도 여럿 개봉을 앞두고 있다. ‘요시노 이발관’과 ‘카모메 식당’ ‘안경’ 등을 연출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신작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와 칸국제영화제가 사랑하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빛나는’이 이달 16일과 23일 차례로 개봉한다. 다음달에는 한국 관객이 특히 사랑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새 영화 ‘세 번째 살인’이 출격한다. 이 영화들은 지난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아 이미 입소문이 났다. 9일 개봉하는 음악 영화 ‘파크’는 일본의 천재 뮤지션 도쿠마루 슈고가 참여한 기대작이다.
일본 영화의 성장세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일본영화의 관객 점유율은 수년간 1%대를 맴돌았지만 올해는 3.8%로, 지난해 1.6%보다 두 배 이상 껑충 뛰었다. 여기엔 1월 개봉한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이 367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대박을 터뜨린 공이 크다. ‘너의 이름은.’은 소수 마니아에 국한됐던 일본 영화 관객층을 넓힌 기폭제가 됐다. 최근의 잇따른 개봉도 ‘너의 이름은.’을 통해 일본 영화의 시장성을 확인한 영향이 크다.
영화수입사 미디어캐슬의 강상욱 이사는 “2000년대 초중반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를 필두로 일본 영화 붐이 일었지만 비슷비슷한 감성팔이가 반복되면서 일본 영화는 재미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다”며 “‘너의 이름은.’의 흥행은 일본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을 호의적으로 바꾼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강 이사는 “최근 몇 년간 일본 영화계가 과거의 문법과 감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시도들을 하면서 질적 발전을 이뤘다”며 “일본 영화의 이야기와 장르가 한층 다양해져 한국 관객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화 관객층의 성향 변화도 또 다른 이유로 거론된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기성 세대가 일본 영화 특유의 ‘오버 액션’ 때문에 정서적 괴리감을 느낀 반면, 1990년대 후반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에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는 일본 영화를 한층 가깝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일본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자란 지금 20~30대가 영화의 주요 소비층이 되면서 일본 영화 시장이 확대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남성 중심의 범죄 스릴러 장르에만 쏠린 한국 영화의 획일화로 인해 소외된 관객층의 수요가 일본 영화에 반영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일본 영화는 주로 멜로물와 청춘물 같은 드라마 장르에서 강세를 보인다. 한국 영화에선 흥행 폭발력이 약하다는 이유로 제작조차 시도되지 않아 어느새 실종되다시피 한 장르다. 그러나 엄연히 관객층은 존재한다. 캐나다 화가 루이스 모드의 실화를 그린 ‘내 사랑’이 7월 개봉해 33만 관객을 동원했고,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도 40만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 ‘러브레터’는 2013년과 2016년 두 차례나 재개봉했다. 최근 일본 영화의 급부상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다. 김형석 영화평론가는 “멜로영화에 대한 갈증이 정서적으로 가까운 일본 영화의 흥행으로 나타나는 측면이 있다”며 “상대적으로 수입가가 낮고 IPTV 같은 부가판권 시장에서의 성과가 나쁘지 않다는 점도 일본 영화가 꾸준히 소개되는 이유로 보인다”고 짚었다.
일부 흥행 사례를 쫓는 마구잡이식 개봉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2000년대 초중반 일었던 일본 영화 붐이 순식간에 식어버린 이유도 일부 감독과 배우의 이름값에만 기댄 출혈 수입 경쟁이었다. 정지욱 평론가는 “일본 영화 시장이 확대됐다고는 해도 아직은 미미하다”며 “과다 경쟁은 오히려 시장을 무너뜨리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조언했다. 강상욱 이사도 “최근 서술형 제목의 일본영화가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오히려 변별력과 주목도가 떨어지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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