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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나랏돈의 지엄함

입력
2017.11.08 20: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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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에 구속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 이른바 ‘문고리 3인방. 왼쪽부터 안봉근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 연합뉴스ㆍ배우한 기자
검찰에 구속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 이른바 ‘문고리 3인방. 왼쪽부터 안봉근 전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 이재만 전 총무비서관,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 연합뉴스ㆍ배우한 기자

여름마다 기획재정부 3층 복도는 예산실을 찾은 타 부처 공무원, 공공기관 직원, 협회 임직원, 이익단체 관계자로 인산인해다. 그들의 손엔 두터운 자료가 들려 있고, 그들의 눈엔 절실함이 가득하다. 적게는 수천 명이 가입한 단체, 많게는 수백만 주민이 사는 지역의 운명을 걸고 적진에 온 이들이다.

그들이 각종 자료와 논리로 무장하고 “이 사업 꼭 필요하다”며 예산실 사무관을 백방으로 설득하려 하지만, 대개는 일단 깎고 보려는 예산실 사무관의 ‘철벽 수비’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기 마련이다. 예산실은 웬만한 유혹엔 쉽사리 나랏돈을 내주지 않는다.

그런 바늘구멍을 뚫으려는 전략도 각양각색이다. 한 부대 사람들을 몰고 와 무력시위를 하는가 하면, “제발 좀 살려달라”며 물고 늘어지는 이들도 있다. 유명 영화배우를 동원하는 반칙성(?) 플레이도 있다. 편성 막바지 수치를 맞추려 배분하는 소액의 ‘자투리’라도 따 내려고, 틈만 나면 사무실을 찾기도 한다.

여전히 사람들은 “세금은 눈 먼 돈”이라고 하지만, 실상 보통 사람들이 나랏돈 먹기란 이렇게나 힘들고, 국고는 이처럼 지엄하다.

그러나 예산실 안팎에서 나랏돈을 놓고 치열한 공ㆍ수 각축전이 펼쳐지는 동안, 한쪽에선 위세를 이용해 나랏돈을 너무도 쉽게 먹는 이들이 있었다. 최근 검찰은 전직 청와대 총무비서관으로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 지시를 받아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를 상납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청와대가 국정원 특수활동비로 총선과정에서 친박 후보를 가리기 위한 여론조사를 한 정황도 드러났다. 사실이라면 대통령이 친위세력을 위해 나랏돈을, 그것도 첩보ㆍ작전 용도로 써야 하는 정보기관 특수활동비를 빼먹은 셈이다.

대통령이 정보기관에서 상납을 받아 사적으로 쓴 혐의를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이 나라를 ‘나의 나라’ 혹은 ‘내 아버지의 나라’라고 여기지 않는 이상,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사고방식이다. 공무원이 나랏돈을 빼돌린 행위는 어떤 상황이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대통령은 나라 곳간을 수호해야 할 책임이 가장 막중한 공복 아닌가.

그럼에도 이를 파헤치고 도려내는 수사마저 ‘정치보복’이라 폄하하는 이들이 여전히 있다. 나랏돈 빼돌리기는 보복이란 말이 나오기 전에 ‘당연히 하지 않았어야 할 일’이다. 지금까지는 정치적 입장 때문에라도 그렇게 주장했다고 하겠지만, 시스템의 수호자가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나랏돈에 손댄 혐의가 나온 이상 ‘보복론’이 설 자리는 없다.

이런 국기문란은 경위와 가담자, 돈의 용처까지를 샅샅이 밝혀야 마땅하다. 전 정권에 대한 사정은 또 다른 복수를 낳을 것이라 혹자는 말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끝까지 추적해 철저히 밝히는 것이야 말로 다음 정권에서 보복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가장 근본적 처방이다. 어물쩍 덮고 드러난 건 사면해 주는 임시봉합이 또 반복된다면, 권력자가 나랏돈에 손대고 시스템을 비트는 역사는 재현될 것이다. 다음 권력은 또 그걸로 꼬투리를 잡게 될 것이다.

이번 기회에 청와대와 정보기관의 예산 편성ㆍ관리 시스템을 확 뜯어고칠 필요도 있다. 대통령 친구, 측근, 문고리가 앉던 자리인 청와대 총무비서관에, 문재인 대통령이 전문 경제관료를 기용한 것은 매우 파격적이다. 하지만 권력기관의 예산 남용 문제에서 언제까지고 권력자의 선의에 기댈 수는 없다. 시스템으로 사전에 통제하고, 사후에 철저하게 검증도 해야 할 것이다. 권력자가 귀찮도록 고자질쟁이와 잔소리꾼을 곳곳에 둬야만 전횡을 줄일 수 있다. 청와대 총무비서관과 국정원 기조실장이 예산실 복도에 줄 서고, 국정원장이 국회 예결위에 출석할 정도의 수고로움을 강제해야 권력기관이 나랏돈을 함부로 다루는 일을 그나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영창 경제부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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