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난 한식 셰프.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부른다. 요리에 관한 한, 나는 무학이다. 요리 학교를 다니지도 않았고, 선배 셰프를 사사한 적도 없다. 타고난 감각과 배려하는 마음과 좋은 식재료. 요리는 그 세 가지면 된다. 그때 그때 내놓는 음식이 셰프의 학력이자 얼굴 아닌가. 지난해 ‘미쉐린(미슐랭) 가이드 서울편’에서 내 식당(서울 여의도동 ‘곳간 by 이종국’)이 2스타를 받았으니, 세상이 실력을 알아봐 준 셈이다. 올 초 세계 미식 투어를 기획한 포시즌스 호텔도 서울 파인다이닝을 대표하는 셰프로 나를 지목했다. 스승이 없다는 사실이 혹독한 채찍이 됐다. 혼자 서고 버티려 더 치열하게 했다. 요리 학교를 다녔다면 틀에 갇히지 않았을까. 고정관념 없이 접근하는 자유로움이 나와 내 음식을 만들었다.
내게 요리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늘 배운다. 가르침이 곧 배움이라는 건 평범하고도 무거운 진리다. 9년 전부터 요리를 가르쳤다.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인테리어 회사를 할 때였다. 요리 솜씨가 알려져 잡지에 음식 칼럼을 연재했다. 글을 본 몇 명이 요리를 배우겠다고 하길래 집으로 불렀다. 소문이 나 학생이 순식간에 늘었다. 이게 운명이다 싶어 뛰어들었고, 음식에 무섭게 미쳤다. 수업에서 콩잎을 다룬 적이 있다. 한 학생이 울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년 만에 다시 먹는 콩잎이라면서. 수업이 끝나고 콩잎을 잔뜩 싸 주니 더없이 행복해했다. 다른 학생은 얼마 전 갖가지 귀한 나물을 보내 주면서, 음식 꾸미는 데 쓰라고 고운 찔레꽃을 함께 싸 보냈다. 내가 가르치는 요리는 그런 교감이고 나눔이고 이야기다.
수업 교재나 레시피북 같은 건 없다. 레시피는 계절, 날씨, 작황 따라 달라지는 식재료에 맞춰 만든다. 지난해 냉이와 올해 냉이가 다르고, 지난해 장맛과 올해 장맛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요리하나. 그래서 공부한다. 학생들에게 가르쳐 줄 새로운 지식, 식재료에 숨은 이야기를 찾아다닌다. 학생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이유다. 나도 배우는 과정이기에 내 요리도, 철학도 미완성이다. 앞으로 계속 바뀔 것이다. 요즘은 텅 빈 캔버스에 점 하나 찍듯, 비워내는 음식을 만든다. 단아해서 몸이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음식, 사람을 살리는 음식.
아이의 엉덩이를 톡톡 치며 격려하는 것처럼, 식재료의 맛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게 셰프가 할 일이다. TV 드라마에 나오는 프라이팬을 집어 던지는 셰프, 한 마디만 하면 보조 셰프들이 “네! 셰프!”하고 벌벌 떠는 셰프는 가짜다. TV에 자주 출연하는 셰프가 다 내공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왜 그 음식을 만드는지도 모르면서 멋진 포즈로 소스나 뿌리는 게 셰프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유행 따라 휙휙 뜨고 지는 요즘 음식에 과연 진심이 담겨 있을까. 양심을 속이고 음식을 만드는 건 죄다. 바깥 식당엔 거의 가지 않는다. 매일 세 끼를 집에서 차려 먹는다.
내 학생들은 내로라하는 집안 ‘사모님’이 대부분이다. 좋은 식재료만 쓰다 보니 수업료가 비싸서다. 언젠가는 수업 문턱을 확 낮추고 싶다. 문화는 공유하고 전파해야 하는 것이니까. 내가 파는 음식도 비싸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러나 싼 음식이 있으면 비싼 음식도 있는 게 당연하다. 1인분에 50만원을 받으면 그 만큼 대접한다. 식사하고 돌아가는 분의 마음에 시 한 편, 소설 한 편 남겨 드리려 한다.
9년 동안 만들고 가르친 레시피가 500개가 넘는다. 레시피 만드는 원칙은 간단하다. 먹는 이를 배려하고, 만드는 이가 편하게 요리할 수 있고, 식재료가 품은 맛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레시피. 어머니라는 말에 새겨져 있는 한국의 원초적 맛을 새롭게 표현하려 한다. 우리 어머니들에게 음식은 가족에게 매일 정성껏 지어 먹이는 보약이었다.
어머니. 가슴을 찢는 이름이다. 18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독대에서 펑펑 울었다. 3남 1녀인 우리 형제들에 주려고 부지런히 모아 둔 말린 나물이 잔뜩 나왔다. 애틋한 모정과 노년의 외로움이 어두운 독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는 미식가였다. 까다로운 요리 지침을 내려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카레는 미군 부대에서 구한 숟가락으로 떠 먹는 게 에티켓이라거나, 이런 종류의 생선은 꼭 숯불에 구워 먹어야 제 맛이라거나. 백사 이항복과 독립운동가 이회영 집안이니, 넉넉하게 먹고 산 시절이었다. 내 식성도 만만치 않아 반찬 투정을 종종 했다. 아침마다 도시락 통을 열어 보고 반찬이 별로이면 빈손으로 학교에 갈 정도였다. 어머니는 별스러운 식구들을 묵묵히 보듬었다.
서울 효창동에 살면서 어머니를 따라 용문시장을 자주 다녔다. ‘덤’이라는 것에 흠뻑 빠졌다. 덤은 사람을 넉넉하게 배려하는 마음이다. 물건을 조금 더 얹어 주는 상인의 마음, 정 때문에 당장 필요하지 않은 걸 사 주는 손님의 마음. 셰프의 마음도 그래야 한다는 걸 매 순간 잊지 않으려 애쓴다. 전을 내놓을 땐 간장 옆에 솔잎 붓을 둔다. 간장을 푹 찍지 말고 솔잎으로 살살 발라 맛있게 드시라는 배려다. 전국의 시장을 다니며 심마니, 뱃사람, 시골 장터의 할머니를 만나 귀한 물건을 사고 이야기를 듣는다. 그 분들이 모두 스승이다.
대체 어디서 요리를 배웠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솔직히 말하면, 요리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것 같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야무지게 요리하는 아이로 유명했다. 6살 때 중학생인 형에게 밥상을 차려 주면서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먹으라”고 한 건 두고두고 오르내리는 일화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누나 친구들에게 떡볶이 같은 간식을 자주 해 줬다. 환갑이 넘은 분들이 그 맛이 아직도 기억 난다고 한다. 요즘 나와 일하는 사람들은 나를 ‘딱간’이라 부른다. 대충 맞춰도 간이 딱 맞는다면서.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덕분에 음식에 색도 잘 쓴다. 누나가 “그런 재능을 준 부모님께 감사하라”고 한다.
한식은 우리 음식이고, 우리 언어다. 한식 세계화라는 말을 들으면 한숨부터 나온다. 나랏돈으로 비싼 쇼 몇 번 한다고 한식이 널리 알려지나. 음식 맛으로, 깃든 이야기로 감동을 줘야 한다는 진리를 아무도 고민하지 않는다. 관료들이 걸림돌이다. 음식을 모르니 제대로 된 정책을 펴지 못한다. 음식은 마음이라는 사실을 얼마나 강조해야 사람들이 알아 줄까.
<이종국(57) 셰프와 인터뷰를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리=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현지호 인턴기자 (성균관대 경영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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