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ㆍ시계ㆍ화장품ㆍ주류 등
70여개 브랜드 한손에 거머쥐고
지난해 매출만 49조원 육박
케링ㆍ리슈몽 등 경쟁사 크게 앞서
“성장 없는 기업은 몰락을 의미”
중앙집권 버리고 브랜드별 ‘분권’
中ㆍ러시아ㆍUAE 등 신흥시장 공략
철저한 품질관리ㆍ인재발굴도 앞장
1970년 뉴욕 JFK 공항, 비행기에서 내린 프랑스 청년은 택시에 올라탔다. 그에겐 첫 미국 방문이었다. 기사가 물었다. “프랑스인이시군요.” “네. 맞아요. 프랑스에 가보신 적 있어요?”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지금 프랑스 대통령이 누군지는 아세요?” 택시기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하지만 크리스챤 디올은 알죠.”
청년은 생각했다. 디올 같은 국제적 브랜드야말로 진정한 자산이라고. 그런 브랜드를 발판으로 삼으면 뭔가 큰 사업을 벌일 수 있겠다고. 예술과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에콜 폴리테크니크(프랑스 국가 엘리트 교육기관인 그랑제콜의 이공과 계열 대학) 학생은 14년 뒤 결국 디올을 수중에 넣고 다시 5년 뒤 명품제국 LVMH(모엣 헤네시ㆍ루이 비통)의 수장이 된다. 그는 ‘명품의 황제’ 또는 ‘캐시미어를 두른 늑대’라 불리는 전 세계 명품업계의 제왕 베르나르 아르노(68)다.
LVMH는 오늘날 럭셔리 산업에 있어서 히말라야 산맥 같은 기업이다. 루이 비통ㆍ디올ㆍ펜디ㆍ지방시 같은 패션 브랜드에서 불가리ㆍ쇼메ㆍ위블로ㆍ태그호이어 등 시계ㆍ주얼리 브랜드, 겔랑ㆍ겐조 등 화장품, 모엣&샹동ㆍ돔 페리뇽ㆍ샤토 디켐 등 주류 브랜드까지 70여 개 명품 브랜드가 한데 모여 있다. 그룹의 지난해 매출액은 376억유로(약 48조7,630억원)로 구찌, 이브생로랑, 보테가 베네타 등을 보유하고 있는 케링(Keringㆍ124억유로), 카르티에, 반 클리프 앤 아펠, 몽블랑 등으로 유명한 리슈몽(Richemontㆍ111억유로) 등의 경쟁사를 크게 앞섰다.
LMVH의 대주주이자 회장, 최고경영자(CEO)인 베르나르 아르노는 이 회사가 처음 설립된 1987년 100억프랑(현재 기준 약 15억유로)에 불과했던 연 매출 규모를 30년 만에 25배로 키웠다. 지난 10년만 해도 2006년 153억유로에서 2010년 203억유로, 2014년 306억유로, 지난해 376억유로로 치솟았다. 아르노 회장의 재산은 630억달러(약 70조원ㆍ1일 기준)로 1일 현재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꼽은 ‘세계 최고 부자’ 7위에 올라 있다. 프랑스인 가운데선 가장 높은 순위다.
30대 부동산 사업가, 명품 제국의 황제가 되다
아르노는 1949년 프랑스 북부 소도시 루베의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는 패션이나 예술보다 수학과 과학에 재능을 보였다. 진학도 이공과 계열로 했다. 그러나 아르노는 아버지처럼 사업에 뜻이 있었다. 졸업 후 아버지의 회사에서 경영 수업을 시작한 아르노는 8년 만인 1979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회장 자리에 올랐다. 1981년 프랑스의 정권이 바뀌면서 그의 삶도 변화를 맞는다. 미테랑 대통령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경제정책에 불안감을 느낀 아르노는 미국행을 결심한다.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아르노는 미국에서 부동산 사업을 추진하는 틈틈이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투자 대상을 찾던 그에게 희소식이 들려왔다. 디올의 모기업인 부삭이 부도 직전의 위기에 몰려 정부의 수혈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디올을 시발점으로 잠재력이 큰 저평가 기업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재능 있는 아마추어 피아노 연주자이자 미술 애호가로서 평소부터 예술적 창조작업과 고도의 정교한 공정에 관심이 많았던 아르노의 사업 방향은 부동산에서 럭셔리로 급선회한다.
마침 미테랑의 경제 정책도 이전보다 보수적인 방향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뉴욕에서 동업자의 도움을 받아 부삭의 서류를 꼼꼼히 검토하던 아르노는 디올 중심으로 부삭의 사업을 재편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생각에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파리행 비행기에 오른다. 모든 서류를 외울 정도로 회사의 상태를 꿰뚫은 그는 사업 계획을 세운 뒤 아버지와 투자자들을 설득해 자본을 끌어 모았고 부삭 이사진과 정부 인사들을 상대로 설득에 나섰다. 이런 노력 끝에 아르노는 어렵지 않게 부삭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당연히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35세 젊은 부동산 사업가가 디올의 명성을 되살릴 것이라고 내다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부삭을 인수한 아르노는 본격적으로 냉혹한 사업가 기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디올과 봉마르셰 백화점을 제외한 사업분야를 과감하게 정리하고 직원들을 대량 해고했다. 2년 만에 회사를 흑자로 돌려놓은 그는 이를 발판 삼아 LVMH로 눈길을 돌렸다. 럭셔리 산업의 리더가 되겠다는 목표에 정확히 들어맞는 회사였기 때문이다. LVMH는 모엣&샹동과 헤네시가 뭉친 모엣 헤네시가 루이 비통과 합병해 1987년 탄생한 회사다. 아르노가 LVMH의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지분을 급격히 늘려서가 아니었다. 주류 사업을 맡은 모엣 헤네시 출신의 슈발리에 회장과 패션 사업을 맡은 루이 비통 출신의 라카미에 부회장 사이의 주도권 싸움이 더 큰 이유였다. 영국의 주류회사 기네스까지 관여된 LVMH 내부의 거대한 암투는 치열한 법정공방과 힘겨루기 끝에 아르노의 승리로 끝이 났다. 아르노는 불과 마흔의 나이에 LVMH의 최대 주주이자 그룹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아르노의 LVMH 정복은 1980년대 후반 프랑스 자본주의가 폭발적인 부흥을 하던 시기에 벌어진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성공의 첫째 조건은 엄격한 품질관리
아르노는 LVMH 회장의 자리에 오른 뒤 럭셔리 브랜드를 인수하는 데 집중했다. 탄탄한 자금력을 동원해 겐조, 지방시, 겔랑, 마크 제이콥스, 쇼메, 세포라, 펜디, 도나 카란, 태그호이어, 불가리 등을 속속 수중에 넣었다. 인수합병(M&A)을 통한 공격적인 성장 전략은 LVMH가 럭셔리 업계에서 1인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잇따른 적대적인 M&A로 인해 ‘기업 사냥꾼’ ‘캐시미어를 두른 늑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기업이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몰락을 의미한다”며 앞만 보고 나아갔다.
명품 브랜드들이 LVMH에 합류하면서 회사는 급성장했다. 주가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기업이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면 어느 순간 통제력을 잃고 휘청거리기 마련이지만 LVMH는 예외였다. 중앙집권적 경영 방식이 아닌 분권화된 브랜드 전략이 비결이었다. 아르노는 “중앙집권 방식은 기업가정신을 파괴한다”며 각 회사마다 적임자가 경영을 도맡아 책임질 수 있게 해줬다. 그룹 경영진은 브랜드 책임자들과 함께 전략을 이끌어내고 그에 따라 투자를 결정하는 데 집중했다.
아르노가 그룹 차원의 전략에서 다섯 가지 원칙으로 꼽는 것은 상품의 질, 창의성, 이미지, 기업정신 그리고 끊임없이 성찰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철저한 품질 관리와 독창적인 인재 발굴은 그룹 전략의 핵심이다. LVMH 매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브랜드인 루이 비통은 치밀하게 짜인 프로그램으로 교육된 직원들이 자체 공장에서 수공업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아르노는 루이 비통의 성공 요인을 “거의 완벽에 가까운 품질을 지속적으로 선보였기 때문”이라고 자부한다. 최고급 와인인 샤토 디켐도 마찬가지다. 수확된 포도의 품질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 해에는 와인을 생산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훌륭한 인재가 기업의 생사를 결정한다
아르노 회장의 창의적인 인재 기용은 LVMH가 지속적인 혁신을 이루는 원천이 됐다. 마크 제이콥스(루이 비통), 알렉산더 매퀸, 리카르도 티시(이상 지방시), 존 갈리아노(지방시, 디올), 피비 필로, 마이클 코어스(이상 셀린느), 칼 라거펠트(펜디)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아르노는 기업 성공의 열쇠는 규모가 아니라 재능이라고 강조하며 “훌륭한 재능을 갖춘 인재를 모으는 것이야말로 기업의 생사를 결정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이는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경영진부터 말단 직원까지 해당하는 이야기다.
아르노 회장은 브랜드를 늘리는 것뿐만 아니라 소비층을 확장하는 데도 천부적이었다. 고급 브랜드라는 이미지에 흠을 내지 않는 선에서 서민층도 고가의 브랜드에 접근할 수 있도록 비교적 저렴한 액세서리 제품을 내놓았고, 유럽 중심이었던 시장의 한계를 벗어나 중국, 몽골, 브라질 등 신흥 시장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지난해 LVMH의 전체 매출에서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시장의 비중은 26%에 달했다.
아르노의 시도가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1987년부터 의욕적으로 지원했던 크리스티앙 라크루아는 몇 차례 주인이 바뀐 뒤 파산했고, 1999년 지분을 34%까지 늘리며 인수를 추진했던 구찌는 경쟁사인 PPR(현 케링)에게 빼앗겼다. 패션계의 아마존을 표방한 부닷컴(boo.com)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보는 등 인터넷 사업은 대체로 성적이 좋지 않았다. 명품 전문 전자상거래 사이트 이럭셔리닷컴도 문을 연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덩치가 커지면서 성장세가 둔화하고 있긴 하지만 아르노 회장의 LVMH 제국은 계속 확장하고 있다. 올해 3분기까지 매출도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4% 늘었다. 무엇보다 중국, 러시아, 아랍에미리트(UAE) 등 신흥 시장의 수요가 여전히 탄탄하다. 아르노 회장은 그간 소극적이었던 온라인 판매를 강화해 LVMH 전체 제품을 판매하는 사이트도 열 계획이다. 정보통신기술(ICT)을 접목한 상품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는 명품의 가치가 전통에서 출발하지만 현대성과 새로움이 더해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명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되 어디까지나 브랜드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창의성을 접목해야 합니다. 루이 비통이 여전히 주목 받는 것도 창의적 시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창조적 열정을 바탕으로 LVMH는 앞으로도 계속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브랜드의 집합체로 남을 것입니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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