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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움직일수록 옴짝달싹 갇힌다” 들뢰즈에 대한 도발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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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움직일수록 옴짝달싹 갇힌다” 들뢰즈에 대한 도발적 해석

입력
2017.11.03 04:40
22면
0 0

“멀리 떨치고 나아가자”

노마드·탈주에 열광하는 건

들뢰즈 철학 오인에서 발생

이 드넒은 세상을 유유히 떠돌아 다니는 우리는 노마드! 일본 철학자 지바 마사야는 "괜히 오버하지 마라" 꾸짖는다. 게티이미지뱅크
이 드넒은 세상을 유유히 떠돌아 다니는 우리는 노마드! 일본 철학자 지바 마사야는 "괜히 오버하지 마라" 꾸짖는다. 게티이미지뱅크

너무 움직이지 마라

지바 마사야 지음ㆍ김상운 옮김

바다출판사 발행ㆍ420쪽ㆍ2만5,000원

‘퀀텀 점프(Quantum jump)’. ‘양자 도약’인데, 뭔가 새롭고 최첨단적인 뉘앙스의 말을 좋아하는 경영이나 마케팅 쪽이 재빨리 가져다 쓰면서 널리 알려졌다. 사람 홀리려면 그럴싸하니 좀 있어 뵈는 말로 뻥 치는 게 먼저니까. 그리하여 회사 사장님은 종무식에서 “내년을 우리 회사가 퀀텀 점프하는 원년으로 삼겠다”고 선언하면, 직원들은 월급쟁이의 의무감에다 월급도 양자적으로 도약하길 바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열심히 박수 치지만, 정작 물리학자들은 피식 웃는다. 양자적 도약이란 양자들이 아무렇게나 막 튄다는 뜻이다. 속된 말을 쓰자면 ‘지랄탄’이란 얘기다. 고로 사장님의 종무식 발언은 앞으로 수년간 이 회사를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르게 막 굴러다니도록 하겠다는 선언이다.

노마드니, 탈주니 하는 말들의 용법도 사실 이런 ‘퀀텀 점프’랑 좀 비슷하다. 이 내 소중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이 글로벌화된 시대에 영어와 노트북 두 가지 무기를 들고서는 저 드넓은 세상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게만 된다면 이 세상은 엄청나게 달라질 꺼야, 라는 일종의 정신승리법 증상이 농후한 자아 판타지 서사로 둔갑해버리는 것이다. 진보라는 이들이 늘 입에 붙이고 다니는 지겨운 문구를 빌리자면 ‘신자유주의 자기계발 서사’와 닮아버린다. 그래 놓고는 업무시간 이외에는 카톡을 금지해야 한다는, 꽉 막힌 대도시의 사무실을 탈주한 디지털 노마드로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이율배반적인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너무 움직이지 마라’는, 질 들뢰즈가 쓴 노마드니 탈주니 하는 말들이 이런 식으로 전용되는 현실에 브레이크를 걸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일본의 젊은 철학자가 쓴 이 책을 짧게 정리하자면 이제까지의 들뢰즈 해석이 시적 문장을 즐겨 쓰는 문체상 유사성이나 ‘지속’이나 ‘생성변화’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베르그송의 후예로서의 들뢰즈쪽으로 기울어 있다면, 이제는 ‘단절’을 중시한 영국 경험론자 흄의 후예로써의 들뢰즈로 다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써두면 재수없으니 현실의 예로 돌아가보자.

가령 ‘먹튀 자본’ 논란은 어떤가. 우리 정부와 여러 겹의 소송전을 벌이고 있는 사모펀드 론스타는 어떤가. 최근 GM의 한국공장 철수설을 둘러싼 여러 논란은 또 어떤가. 우리는 이 글로벌 노마디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채 여전히 낡아빠진 민족주의에 매달려 징징대는 촌놈일 뿐인가. 아니면 글로벌 자본주의니 뭐니 하는 서양 중심의 최신 유행 ‘말빨’에 취해서 제 몫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줏대 없는 바보일 뿐인가.

아마 대도시에서 멋진 정장을 차려 입고 서류작업을 주로 하는 세련된 고학력자들은 전자에 가까울 것이고, 중소도시에서 기름 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땀 흘리는 공장 노동자들은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실제 농민으로서 생태주의에 천착해온 천규석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실천문학사)라는 비판서를 통해 노마디즘이 서구 제국주의의 다른 얼굴일 뿐이라는 논지를 펼쳤고, 천규석의 이런 노마디즘 비판을 두고 우리 철학계에서도 이런저런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연히 우리만 그럴 리 없다. 책엔 좌파를 자임하는 알랭 바디우가 들뢰즈를 그토록 비판했던 이유도 설명해뒀다.

“유목민은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자의식의 폭주를 절제하라”

日 젊은 철학자의 새로운 시각

저자는 이 모든 소동의 원인으로 무조건 저 멀리 떨치고 나아가자는 주장으로만 들뢰즈를 이해한 점을 지목한다. 짐작되는 부분은 있다. 들뢰즈 철학은 알려졌다시피 1960년대 68혁명의 소산이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우파 전체주의는 물론, 좌파 전체주의에 치를 떨었다.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탄핵하고 달아난 뒤, 그 대신 전 세계와 접속해버렸다.

그러나 들뢰즈를 그렇게만 읽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디지털 기술 발달로 모두가 한 다리 건너 다 연결된 세상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저자는 1988년쯤 행해진 말년 인터뷰에 나온 들뢰즈의 이런 목소리를 가져온다.

“그래서 저는 여행이 내키지 않습니다. 생성변화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다면 너무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저는 토인비가 쓴 한 구절 때문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목민이란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라져버리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유목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의 알파요, 오메가인 문장이다. 저자는 “사람이 너무 움직이면, 많은 것에 과도하게 관계되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다”며 들뢰즈의 저 말을 “자의식의 폭주와 무의식의 폭주를 모두 절제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오늘도 스마트폰을 들고 페이스북을 켜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라고 묻는다. 그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매 순간 모든 이슈에 대해 나만의 독특한 - 그러나 실은 별달리 새로울 것은 없는 - 의견을 내놓으라 요구한다. 자존감과 자신감 넘치는 우리는 마치 홀린 듯, 저마다 품어왔던 오랜 개똥철학들을 망설임 없이 줄줄 쏟아 낸다. 들뢰즈는 이런 말도 한다. “정말로 바람직한 것은 이러저러한 논점에 관해 그 어떤 의견도 갖지 않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것을, 굳이 이 세상에 자유롭게 활짝 펼칠 것까진 없다. 그게 세상의 평화에 더 기여할 수도 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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