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자에 그림 묵상 쓰다가
우연히 김호석 화백 그림 만나
‘종교적 의미 보여주는 작품’ 탄복
작품과 함께 담은 묵상 출간
“작품마다 신에 대한, 절대자에 대한 알레고리를 읽어 낼 수 있어서 너무 기뻤습니다. 수도자로서 그림이 제게 말을 걸어오는 바 그대로를 기록해 뒀을 뿐입니다.”
김호석 화백의 작품 수십 점을 읽어 낸 기록 ‘수녀님, 서툰 그림읽기’(선출판사)를 내놓은 장요세파 수녀의 짧은 대답이었다. 장 수녀는 경남 창원시 트라피스트 봉쇄수녀원 소속이다. 수녀원 앞에 ‘봉쇄’가 붙은 데서 알 수 있듯, 일단 한 번 들어가면 외부와의 접촉이 철저히 차단된다. 새벽 3시30분 일어나 오후 8시30분 잠들 때까지 7번의 기도, 6시간의 노동에다 여러 차례에 걸친 명상과 독서 등 빽빽한 일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 와중에 틈틈이 쓴 글들이다. 인터뷰 또한 짬날 때마다 잠깐씩 전화로 이뤄졌다.
출발은 15년 전쯤이다. 900여명의 후원자에게 감사의 뜻을 담은 소식지를 보내는데 거기에다 그림에 대한 짧은 묵상을 썼다. 수녀원 소식지니까 처음엔 성화(聖畵)가 소재였지만 쿠르베, 렘브란트, 고흐의 작품이 더 많아졌다. “성경을 고스란히 옮겼을 뿐인, 그것도 벌거벗은 몸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그린 성화”에선 오히려 종교성을 찾을 수 없었다. 반면 고흐의 ‘구두 한 켤레’ 같은 작품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종교성이 가득했다. 낡고 뒤틀린 구두 자체가 예수님 같았다. 최첨단 현대미술은 와 닿지 않았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번쩍이고 탐미적이긴 한데 혼란, 혼돈, 분열, 병적 증세만 감탄할 정도로 잘 묘사할 뿐” 초월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해 실망했다.
그러던 중 김호석 화백의 그림 ‘세수하는 성철스님’을 만났다. 수도란 무엇인지 간결하게 일러 주는 그림에 반했다. 소식지에 쓰려다 연락이 닿았고, 낯선 수녀의 관심에 김 화백은 작품집을 선물했다. 쭈글쭈글한 촌로(村老)의 얼굴을 정밀하게 그린 ‘마지막 농부의 얼굴’, 목어를 쳐다보는 고양이를 그린 ‘관음’ 같은 작품을 보고 “수도자의 자세, 종교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보여 주는 작품”이라며 무릎을 쳤다.
김 화백은 털 한오라기까지 정밀하게 묘사하는 조선 초상화의 전통을 이은, 초상화의 1인자로 꼽힌다. 성철·법정 스님 같은 종교인, 김구 같은 역사적 인물들은 물론, 정치인으로는 퇴임 직전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리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부부 외엔 아무도 모르던 눈썹 속 상처까지 그려 내는 김 화백의 솜씨에 탄복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책엔 초상화가 없다. 장 수녀에겐 아무래도 종교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가톨릭 계열 출판사 등에서 이런 저런 출간제의가 잇따랐지만 책 낼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책을 위한 원고라기보다 스스로 수도의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 수도의 일환으로 끄적인 짧은 메모라 생각해서다. 이게 역공의 빌미가 됐다. “수도 생활의 묵상 끝에 나온 결과물인데 이게 어찌 네 것이기만 하냐”는 설득에 그만 넘어갔다. “글을 내놓기가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만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저 이 책이 수도하는 이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이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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