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안녕달 지음
사계절 발행ㆍ52쪽ㆍ1만2,000원
설날 아침, 모처럼 3대가 둘러앉은 밥상머리에서 할아버지가 말한다. “우린 소도 없고 닭도 없고 개도 없고. 우리도 강생이 한 마리 키우자.” 아빠가 그 저녁으로 옆 동네 강아지 한 마리 데리고 왔다. “강생이는 빨간색이 좋은데.” “메리야, 인자 여가 느그 집이다.” 강아지를 맞이함에 할아버지는 뜬금이 없고 할머니는 주저함이 없다. 그날 밤늦도록 엄마 찾아 낑낑대던 메리, 시간 흘러 어느덧 다 자란 메리가 되었을 때, 뜬금없던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홀로 남은 할머니, 그 곁에 아무나 보고 짖지도 않고 꼬리를 흔들흔들 흔드는 순한 메리.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노망이 난 가운데도, 단지 소도 닭도 없어서 강생이 한 마리 키우자 한 게 아니었는지도. 그러고 보니 할머니 또한, 그저 다른 이름을 몰라서 강아지를 대뜸 메리라 불렀던 건 아니었겠다. 전에 키우던 개도 메리였고, 전전에 키우던 개도 메리였으니. 그뿐인가, 할머니네 동네 개들은 몽땅 이름이 메리다.
봉숭아 핀 여름날, 그 많은 메리 가운데 할머니네 메리에게 떠돌이 수캐 하나 다녀가고, 얼마 뒤 메리는 새끼 세 마리를 낳는다. 아직 이름 없는 강아지 세 마리. 그래도 언놈이 언놈인지 다 아는 할머니는 놀러 온 옆 동네 할머니 외로운 눈치에 젤로 살가운 놈 하나 업혀 보내고, 배달 나온 슈퍼 집 할아버지 손수레에 젤로 기운 센 놈 하나 실려 보내고, 마지막 남은 한 마리는 마실 온 이웃 할매 손녀딸 품에 안겨 보낸다.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시골에 떠맡겨진 그 아이가 다리 하나 짧게 태어난 그 녀석에게서 당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 밤, 잎 진 겨울나무에 희미한 눈발 고요히 내려앉는데, 새끼들 떠나보낸 슬픈 메리는 늦도록 눈 맞으며 낑낑거린다. 그래도 여전히 아무나 보고 짖지도 않고 꼬리를 흔들흔들 흔드는 순하디 순한 메리. 다시 할머니와 단둘만 남았다.
또 얼마큼 시간이 흘러 은행잎 노랗게 물든 한가위. 명절에나 한 번씩 찾아오는 자식들 우르르 왔다가 우르르 떠나간 뒤, 할머니 홀로 남아 진지를 잡숫는다. “혼자 사는데, 무슨 음식을 이래 많이 놓고 가나. 다 묵도 못하도록.” 그러면서도 갈비찜을 참 맛나게 자시던 할머니, 자꾸 창밖을 힐끔거리다가 끙! 상을 들고 마당으로 나가신다. “니도 추석이니까 많이 무라. 이게 그 비싼 한우갈비다.” 평상에 앉아 갈비토막을 건네는 할머니에게 메리는 제일 신나게 꼬리를 흔들흔들. 그렇게 시골마을에 황혼이 진다.
북적대는 설날 아침 밥상에서 시작한 그림책이 할머니와 메리 단둘만 남은 추석날 저녁 밥상에서 끝났다. 흔하디 흔한 농촌 풍경. 젊은이들 죄다 도회로 떠난 휑한 마을을 노인들만 남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강아지라면 그저 ‘메리’로 그만인 무던한 노인들, 헤어진 어미아비 자기들 편차고 떠맡긴 아이를 묵묵히 돌보는 순한 노인들. 거기 그 노인들처럼 무던하고 순한 ‘메리’라도 있어 쓸쓸함이 덜한데, 정이 없는 세월은 흘러만 갈 테니 할머니도 머잖아 세상을 뜨실 게다. 그러면, 메리는 누가 먹이고 시골집은 누가 지킬까?
배경은 더없이 쓸쓸한 현실이지만, 이야기는 경쾌하게 다가와 따뜻하게 안긴다. 젊은 손길 닿지 않아 남루한 시골 풍경이 자잘한 세부까지 그대로건만, 그 풍경을 그려 낸 그림은 꼬질꼬질하면서도 따뜻하고 짠하게 아름답다. 그림이란 보는 대로 그리는 것이니, 작가가 그 풍경을 그리 본 덕분이리라. 그 따뜻한 눈길 보태지고 또 보태지고, 그 짠한 풍경 보여지고 또 보여지면 조금씩 나아지려나? 고향집 다시 떠들썩해지고, 이웃집 손녀딸 얼굴에 그늘 걷혀 더 밝고 명랑하고 씩씩해지려나? 메리가 흔들흔들 꼬리를 흔든다.
김장성 그림책 작가ㆍ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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