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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유럽] 이류 음식을 먹나? 차별 느끼는 동유럽인들

입력
2017.10.27 20:0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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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텔라. 한국일보 자료사진
누텔라. 한국일보 자료사진

폴란드 서부에 있는 포즈난시. 2차 대전 중 독일의 영토였다가 종전 후 폴란드로 반환되었다. 독일 수도 베를린시에서 이곳까지는 버스로 2시간 정도 걸린다. 포즈난에서 오더 강 건너편의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는 30분이면 닿는다. 폴란드 사람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대형 할인 슈퍼마켓 ‘알디(Aldi)’를 즐겨 찾는다. 포즈난에도 알디가 있지만 폴란드 시민들이 보기에 독일 알디의 물건 품질이 훨씬 더 좋다. 폴란드 시민들은 특히 식빵에 발라 먹는 초콜릿 스프레드 누텔라와 M&M 초콜릿을 선호한다.

같은 알디인데 독일과 폴란드에서 판매되는 제품이 차이가 난다고 한다. 폴란드 시민들이 막연하게 느꼈던 이런 불만이 유럽연합(EU)의 공식 의제가 돼 다뤄지고 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등 2004년 5월 EU 회원국이 된 동유럽 4개국(비세그라드 4국)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지난 3월 초 슬로바키아의 로버트 피코 총리는 “동유럽 시민들이 이류 소비자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 행정부 역할을 하는 EU 집행위원회가 이런 불만을 경시한다. 국제적 스캔들이자 모욕이다”라고 집행위를 강력하게 성토했다. 비세그라드 4개국은 지난 7월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의 기자회견에서도 이 문제를 함께 지적하며 공동 대응을 선언했다.

EU는 영국을 포함해 28개 회원국, 5억1,000만명의 인구를 거느린 세계 최대의 단일시장이다. 상품과 서비스는 물론이고 자본과 노동도 자유롭게 이동하여 경제 분야에서는 사실상 거의 단일국가와 흡사하다. 동유럽 국가들에 공급된 제품 품질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일부 언론에 거론되자 이탈리아의 다국적 식품기업 누텔라와 미국 M&M 초콜릿은 사실이 아니라고 펄쩍 뛴다.

EU는 단일시장이지만 회원국의 입맛에 맞춰 같은 식품이라도 성분을 달리하는 것은 허용한다. 식품업체 튤립(Tulip)이 제조ㆍ판매하는 점심용 통조림의 경우 독일에서는 돼지고기, 체코에서는 닭고기가 주원료로 쓰인다. 체코 정부가 이 문제를 제기하자 업체는 다른 제품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독일 통조림의 포장과 제품 이름은 체코 통조림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유사하다.

업체들은 동유럽 시민들이 선호하는 입맛에 맞춰 성분을 달리해 제조ㆍ판매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다국적 기업들이 제조과정에서 명기된 성분에 따라 제품을 만들어도 현지 공급망에서 품질이 낮은 재료를 쓸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한다. 이윤 극대화가 목표인 기업이 저가의 원자재를 쓰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합리적이다.

비세그라드 4개국이 계속해 문제를 제기하자 집행위원회도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3월 중순 브뤼셀에서 열린 회원국 수반들의 모임인 유럽이사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다. 회원국 관계자들로 구성된 고위포럼을 설치해 식료품 공급망의 운영을 검토하기로 했다. 또 장클로드 융커 집행위원장은 지난달 13일 EU의 비전을 제시하는 유럽의회 연례 연설에서 “EU 회원국 시민은 평등하다”며 “이류 소비자는 없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집행위는 2018년 상이한 품질에 대처하기 위한 식품 공급망 관련 법안을 제정할 예정이다.

하지만 EU의 대처는 동유럽인들이 보기에 미흡하다. 동유럽 국가의 식품안전처에서 다루는 식료품의 성분 실험을 돕기 위해 겨우 100만유로(약 13억여원)를 지원하겠다는 것. 또 말로는 드러나지 않는 품질 차이에 대처한다고 하지만 다국적 기업들이 성분을 속인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이 때문에 집행위원회의 조치는 어중간하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말 이 논란을 다루면서 EU가 동유럽인들의 불만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비록 비세그라드 4개국 지도자들이 포퓰리스트 경향이 강해 문제를 과장하는 측면이 있지만, 근원에는 동유럽인들의 뿌리 깊은 차별에 대한 불만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2차 대전 후 소련의 압제에서 신음한 동유럽 국가들은 1989년 대부분 평화로운 시민 혁명을 통해 체제전환을 시작했다. 이들은 원래 가치공동체 ‘유럽’에 속했지만 2차대전 후 강대국의 패권정치 때문에 서유럽과 인위적으로 분단됐다. 이후 유럽에 다시 편입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해 EU 회원국이 된지 13년이 지났다. 하지만 식료품 논란에서 드러나듯 아직도 남아 있는 서유럽 국가들의 ‘이류 국가’ 취급에는 “언제까지 가르치려 하느냐”며 불만이 크다.

비세그라드 4개국은 EU 회원국이 합의한 난민의 공동 분담을 계속 거부해 왔다. 4개국 정부를 운영하는 포퓰리스트 민족주의자들은 ‘난민=테러리스트’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동유럽 일부 국가의 이런 정책은 분명히 잘못이다. 하지만 서유럽, 특히 독일이 자신들을 무시하고 정책을 강요한다는 의식이 동유럽 일부 정책 결정자들과 시민들에게 뿌리 깊게 자리한다. 이런 불신이 있기에 이류 소비자라는 지적에 많은 동유럽인이 공감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하나의 유럽이 이런 간극을 메우는 게 무엇보다 필요하다.

안병억 대구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ㆍ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ㆍ진행자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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