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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철의 프레임] 지리적 편중과 의식의 편중

입력
2017.10.26 11:28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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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은 남들도 부자인 줄 안다. 그래서 밥이 없으면 빵을 먹으라고,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친절하게 조언한다. 체력이 좋은 사람들은 남들도 체력이 좋은 줄 안다. 그래서 쉽게 피곤해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의지가 박약하기 때문이라고 면박을 주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이 들어가는 것이 좋은 한 가지 이유는 비로소 체력이 안 좋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병을 공유해야만 심정을 공유할 수 있는 법이다. 코카콜라를 좋아하는 사람은 남들도 그런 줄 안다. 그래서 펩시콜라를 좋아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공부 못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개를 키우는 사람들은 남들도 개를 좋아한다고, 아니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자기중심성 리스트는 끝이 없다.

인간은 자신이 세상의 보편적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한다. 자기의 생각, 기호, 가치, 정치적 성향이 지극히 상식적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널리 공유되어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돼?” 하면서 의견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행위는 정상성(正常性)에 대한 강렬한 욕망의 표출이다. 상식을 들먹이는 이유도 상식적인 나와 비상식적인 소수를 구분하기 위함이다. 이 세상은 나를 포함한 상식적인 다수와 비상식적인 소수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다.

정상과 상식적 인간에 대한 욕망은 관계 편중성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다.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리고 자기들끼리 그룹 과외를 한다. 잘생긴 사람들은 잘생긴 사람들끼리 어울려 다닌다. 선거 때마다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후보들이 난립하는 이유도, 각자의 주변에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도 자신을 지지하는 줄로 착각하기 쉽다. 개표 후에 생각보다 표가 안 나왔다고 놀라는 후보는 많아도, 생각보다 표가 많이 나왔다고 놀라는 후보는 언제나 드물다. 우리의 생각이 잘 바뀌지 않는 이유는 주변 사람들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의식이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가 어울리는 사람들이 바뀌었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아직도 그때 그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면, 그의 생각은 아직 그대로인 거다.

관계 편중성은 지리적 편중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부자들은 부자 동네에 모여 산다. 대학 캠퍼스에는 최소한 대학 재학 이상인 사람들이 모여 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 동네에 사는 경우가 드물고, 고졸자가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들과 한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교류하는 일은 흔치 않다. 관계의 지리적 편중성은 필연적으로 의식의 편중성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는 이유는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기 때문이고, 자기와 비슷한 사람과 어울리는 이유는 그들과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지리적 편중과 관계적 편중, 그리고 그에 따른 의식의 편중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구태여 그것을 부각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가지 이유는 관계의 지리적 편중이 가져오는 의식의 편중이 세상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와 욕망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남들도 부자라고 생각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모든 사람이 먹고 살 만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의 재분배를 위한 노력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욕심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편중되어 있는 것이다.

많이 가진 자, 높이 오른 자, 많이 배운 자들끼리 평생을 어울려 산 사람은 아무리 그 사람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을 지녔다 하더라도, 세상을 보는 시각이 편중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격(格)이란, 관계의 편중성이 가져오는 의식의 편중성을 인식하고,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에 있다. 일부러 부의 수준, 교육 수준, 인종, 성별이 다른 사람들과 자주 교류하려고 하는 사람, 다양한 모임 속에 자신을 집어넣어서 관계 편중성으로 인한 의식의 편중성을 극복하려고 하는 사람이 품격 있는 사람이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지리적 한계를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이 멋진 사람이다.

관계의 지리적 편중과 의식의 편중을 문제 삼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인간을 바꾸는 효과적인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뀌기 위해서는 만나는 사람과 삶의 공간이 바뀌어야 한다. 결심만으로 자기의식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현대 경영의 구루이자 사상적 리더인 오마에 겐이치 역시 인간을 바꾸는 세 가지 방법으로 공간을 바꿀 것, 만나는 사람을 바꿀 것, 그리고 시간을 바꿀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대한민국에서 삶의 지리적 공간을 바꾸는 일은 고작 부동산 투자나 자식 교육을 위한 삼천지교로만 치부되고 있다. 지리적 공간을 바꾸는 일이 자신이 접하는 사람을 바꾸는 일이고, 그것을 통해 의식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길 기원해본다. 집을 사기 위한 좋은 시기란 집값이 떨어지는 시기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싶을 때여야 한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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