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친구는 교토를 두고 한마디로 ‘타임슬립’이라고 했다. 과거와 현재가 얽히고설켜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곳이다.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 소설의 배경이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역시 교토로부터 끝없는 상상력을 펼쳐나갔다. 이 둘만으로도 파악하기 힘든 양감과 함께 기묘한 시간 여행을 하는 셈이다.
일본에서도 가을은 축복이다. 깊고 푸른 하늘에 점점이 구름이 포진하고, 나뭇잎은 농익어가고 있었다. 오사카를 빠져 나왔을 때부터 바깥 풍경은 한결 선명해져 있었다. 나쁜 것은 모두 쓸어가고 좋은 것만 남겨두길. 교토로 가는 긴테쓰 열차는 요람처럼 부드러운 진동과 함께 오사카의 빠른 시간을 서서히 늦춰가고 있었다.
교토의 첫인상은 애초 예상했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삐까번쩍한’ 교토역에서 얼음장이 되었다. 고도로 현대화된 빌딩 속에서 트렁크를 끌고 갈지자로 걷는 사람들, 기모노로 멋을 내고 또각또각 종종걸음을 하는 여인들, 그리고 거품처럼 역으로 몰려오는 사람들 가운데 뚝 떨어진 느낌, 외톨이가 된 기분이랄까. 거대하게 밀려드는 사람의 물결 속에서 ‘타입스탑(Time Stop)’에 가까운 혼돈에 빠졌다. ‘태초의 일본’이었던 교토는, 오늘날 이 역에서부터 ‘미래를 달리는 일본’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를 숨긴 건지도 모르겠다.
교토에서 길을 잃어버릴 일은 없을 것 같다. 도로는 격자무늬의 총집합이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현 시안)에서 따온 긴 직사각형 틀에 갇혀 있다. 점과 점, 선과 선으로 연결된 교토의 도로에서는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돌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낯선 도시에 떨궈진 여행자 입장에선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거란 안도감이 흐르고 있다.
교토는 동서남북 각 방향의 대표 볼거리를 내세워 구역을 나눴다. 동쪽의 북향은 긴가쿠지-오카자키, 동쪽의 남향은 기요미즈데라-기온 구역이다. 서쪽은 아라시야마, 북쪽은 긴가쿠지-키타노 구역으로 명시된다. 남쪽은 지도에 별도로 표기되지 않았지만, 후시미이나리 신사 구역쯤 될 것이다. 각 구역의 대표 관광지마다 현대식 버스로 연결된다. 버스는 대부분 원하는 방향 어디쯤에 부지런히 여행자를 실어 날랐다. 버스 안에 스미는 창 밖 풍경은 대책 없이 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키곤 했다.
교토는 으레 ‘떠오르는 태양’ 일본의 상징적 도시로 규정된다. 천년 고도의 사찰과 충격적인 색감의 신사, 그리고 내적 심성을 달래기에 충만한 정원들. 21세기에 만나는 일본 전통의 종합선물세트라 불리는 것도 과언은 아니었다. 숫자로 표현하면 더욱 현실감 있다. 1,600여 개의 절과 400개의 사당, 17개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여기에 게이샤와 가부키란 문화콘텐츠까지 합세하면 서구인에겐 더할 나위 없는 ‘문화 충격’ 그 자체다. 파란 눈의 포토그래퍼 탕탕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것을 사진에 담기엔 역부족이라는 듯 투덜댔다.
우린 크게 동쪽에서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요정의 천국인 기온 근처 숙소에서 출발해 교토 중심부를 지나 서쪽 아라시야마 산의 정기를 받고 북쪽으로 향했다. 빈틈 없는 조각품 같던 긴가쿠지(金閣寺)와 료안지(龍安寺)를 거쳐 동쪽으로 내달려 긴가쿠지(銀閣寺), 테츠가쿠노미치(철학의 길)에서 숲 산책을 즐겼다. 남쪽의 후시미이나리 신사에서 예정에 없던 등산을 마친 뒤 숙소 근처 기요미즈데라(淸水寺)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매일 황혼이 되면 야사카 신사에서 액을 면해주십사 전등 주변을 어슬렁거리곤 했다.
“대체 몇 번을 더 와야 하는 거야?”
투정 섞인 환희였다. 교토의 진정성은 아마도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효로 만든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여행이 끝나기도 전, 우린 성급히 교토행 다음 티켓을 검색하고 있었다.
※다음 편은 교토의 서쪽 아라시야마 구역으로 넘어갑니다.
강미승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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