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달 사이 대한축구협회는 황폐화됐습니다. 신태용(48)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이 9월 6일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힘겹게 2018 러시아 월드컵 티켓을 거머쥔 직후 터져 나온 거스 히딩크(71ㆍ네덜란드) 전 감독 부임설이 도화선이 됐습니다. 국가대표 사령탑을 둘러싼 내홍이 국정감사 대상이 되는가 하면(이 사안이 과연 국감에서 다뤄지는 게 맞는지 여전히 의문입니다) 방송사의 대표적인 탐사보도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는 축구협회의 비리를 제보 받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국가대표 사령탑을 바꾸느냐 마느냐 혹은 국가대표 경기력이 왜 이리 부진하느냐를 넘어 축구협회의 총체적인 무능력과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사건의 본질이자 우리가 가장 궁금한 건 ‘히딩크 감독이 정말 한국 국가대표 사령탑에 관심이 있었느냐’ 아닐까요? 그 답을 한 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김호곤의 말 바꾸기
이번 사태로 가장 곤욕을 치른 사람 중 한 명은 김호곤(66)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겸 기술위원장입니다.
9월 7일 우즈베키스탄에서 귀국한 뒤 김 위원장은 “히딩크 측으로부터 연락 한 번 받은 적 없다. 아주 불쾌하다”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9월 14일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 축구를 위해 어떤 일이든 할 용의가 있다. 지난 여름에 재단 사람을 통해 축구협회 내부 인사에게 내가 한국 축구를 위해 어떤 도움이든 줄 수 있다는 뜻을 전달했다”고 밝힌 직후 김 위원장의 말이 바뀌었습니다. 히딩크재단 노제호 사무총장으로부터 6월 19일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았다고 뒤늦게 공개한 겁니다.
문제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부회장님~ 2018 러시아 월드컵 한국 국대감독을 히딩크 감독께서 관심이 높으시니 이번 기술위원회에서는 남은 두 경기만 우선 맡아서 월드컵 본선 진출시킬 감독 선임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월드컵 본선 감독은 본선 진출 확정 후 좀 더 많은 지원자 중에서 찾는 게 맞을 듯해서요.~~ ㅎ‘.
노 총장은 이후에도 두 차례 더 김 위원장에게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김 위원장은 아예 답하지 않았고요. 노 총장은 또한 10월 13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에서 “김 위원장과 통화도 했다”며 “김 부위원장이 ‘현안은 본선 진출이니 나중에 대화를 하자’고 답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통화한 기억이 없다”고 반박하며 통화 내역 조회를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통신사에 문의해보니 조회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발신 내역만 가능하고 수신 내역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통화 내역이 있다고 해도 전화를 받은 김 위원장은 알 길이 없고 전화를 건 노 총장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노 총장이 메시지를 몇 번 보냈는지 또 전화를 한 것이 사실인지는 썩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이를 정식 제안으로 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메시지를 받고 나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노 총장과 히딩크 감독이 진짜 감독을 맡을 의사가 있었다면 수 없이 축구협회를 드나들며(한국-러시아 평가전을 중개한 노 총장은 최근까지도 수시로 축구협회를 방문) 왜 저나 안기헌 전무이사에게 말 한 마디 없었겠느냐”는 김 위원장의 항변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미 그를 희대의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었습니다. 김 위원장의 일 처리에 조금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우즈벡에서 귀국하던 날 “예전에 노 총장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지만 그걸 어찌 정식 제의라 볼 수 있나. 월드컵 예선만 국내 감독이 임시로 맡고 나중에 월드컵에 가면 히딩크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기는 방안도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딱 부러지게 정리했다면 불씨를 조기에 잠재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결과론적이긴 합니다만.
노제호의 말 바꾸기
김 위원장 뿐 아니라 노 총장 역시 석연찮은 ‘말 바꾸기’를 했다는 사실은 꼭 짚어봐야 할 대목입니다. 이 때문에 ‘히딩크 감독을 영입하는 것이 한국 축구를 위해 잘하는 선택이냐’는 프레임이 ‘6월에 축구협회에 제안을 했느냐 안 했느냐’는 지엽적인 진실공방으로 둔갑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히딩크 부임설에 대한 첫 기사는 9월 6일 YTN의 ‘[단독] 히딩크, 한국민이 원한다면 국대 맡을 의사 있다‘는 리포트였습니다.
리포트는 6월에 울리 슈틸리케(63ㆍ독일) 전 감독을 해임할 당시 히딩크 측이 축구협회에 제안을 했느냐 안 했느냐 보다 월드컵 진출을 확정한 상황에서 사령탑을 히딩크 감독으로 바꾸는 게 맞느냐를 고민하자는 대목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축구 전문 온라인 매체 풋볼리스트 역시 같은 날 히딩크재단 관계자를 인용해 “아직 히딩크 감독 측과 축구협회 사이에 접촉은 없다”고 기사에서 밝힙니다. 이 기사에서 재단 관계자는 “축구협회 임원들이 우즈벡에 있으니 귀국하면 이야기가 되지 않겠느냐”고도 말합니다. 스포티비뉴스도 비슷한 시간 “히딩크 감독의 최측근에 따르면 히딩크 감독은 본선행과 러시아 평가전이 확정되자 한국대표팀 부임 결심을 굳혔다”고 썼습니다.
본보도 당시 히딩크재단 관계자 혹은 측근으로 표현된 노제호 총장과 전화인터뷰를 했습니다. 본보는 노 총장 실명을 그대로 썼습니다. 익명이라는 점을 악용해 뒤에서 엉뚱한 말을 퍼뜨린 뒤 나중에 ‘자기가 한 말이 아니다’고 발뺌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노 총장과 인터뷰에 쓴 일문일답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럼 당시(6월) 대한축구협회와 접촉을 했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때는 우리가 본선을 확정 짓지 않은 상황이었다. 히딩크 감독이 두 경기 후 탈락할 수도 있는 대표팀을 맡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본선이 확정된 지금은 축구협회에 제안을 해볼 생각인가.
“기사가 이렇게 나오고 있으니 축구협회도 생각해보지 않겠나. 축구협회 고위 관계자들이 곧 타슈켄트에서 들어온다고 하니 무슨 이야기가 있지 않겠나.”
본보 기사를 포함해 위에 언급된 기사들이 모두 틀렸거나 노 총장 말을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면 히딩크 감독 측은 6월에 축구협회에 제안은 하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본보는 당시 노 총장과 통화를 바탕으로 히딩크 논란을 ‘꼼수’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벼랑 끝에서 두 경기를 치러 월드컵 진출에 성공한 신태용 감독이 멀쩡히 있는데 자기가 대표팀 사령탑을 맡겠다고 손을 드는 건 상식을 한참 벗어난 일입니다. 그것도 협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언론에 흘리다니요. 세계 축구에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비신사적인 일입니다. 또한 히딩크 감독이 아니라 히딩크 감독 할아버지가 와도 한국 축구가 남은 8개월 동안 천지개벽할 수 없다는 실리적인 측면에서도 감독 교체는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축구인과 대다수 언론이 하나 같이 ‘히딩크 영입 불가’를 주장한 배경입니다.
하지만 이후 상황은 묘하게 흘러갑니다.
히딩크 감독이 9월 14일 기자회견을 연 뒤 노제호 총장과 김 위원장의 진실공방으로 판이 뒤집히며 축구협회는 ‘양치기 집단’ 취급을 당하고 맙니다.
퍼거슨도 움직인 노제호
노 총장을 잘 아는 몇몇 사람들은 사건 초기 “노제호 총장은 평소 허풍이 좀 심하다. 히딩크 허락 없이 일을 벌렸다가 이런 대형 사고를 치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정작 히딩크 감독은 별 생각이 없는데 노 총장이 ‘자가발전’을 해서 사태가 일파만파 커졌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히딩크 감독과 가까운 축구 관계자 여러 명의 의견도 비슷했습니다.
2002년 한ㆍ일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의 통역을 맡아 365일 붙어있었던 전한진 축구협회 국제팀장, 축구 에이전시인 모로스포츠의 정재훈 대표이사 그리고 2002년 한ㆍ일월드컵 기술위원장으로 히딩크 감독과 동고동락했던 이용수 축구협회 부회장 등은 모두 “히딩크 감독이 지금 한국에 올 리가 없다. 만에 하나 오고 싶다면 이런 방식으로 한국 축구를 곤경에 빠트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이런 예상들을 깨고 네덜란드에서 기자회견을 엽니다. 하지만 기자회견의 주된 내용은 그가 한국 감독을 맡느냐 안 맡느냐, 혹은 감독을 하느냐 기술고문을 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핵심은 “지난 여름에 재단 사람을 통해 축구협회 내부 인사에게 내가 한국 축구를 위해 어떤 도움이든 줄 수 있다는 뜻을 전달했다”는 이 발언입니다. 노 총장이 히딩크 감독의 입에서 나오길 간절히 원했던 바로 그 한 마디 아닐까요.
축구계 안팎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거 축구 에이전트로도 활동했던 노 총장은 수완이 보통이 아니라고 합니다.
9년 전 일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한국은 2008년 2월 6일 투르크메니스탄과 2010 남아공 월드컵 3차 예선 홈경기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에서 ‘두 개의 심장’으로 펄펄 날고 있던 박지성(36)도 대표팀에 소집돼 한국으로 왔습니다. 경기 전날인 2월 5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맨유 에프엔비 코리아(Manchester UNITED F&B KOREA) 한국 내 독점 사업 조인식’이 있었습니다. 맨유 카페와 레스토랑 등의 한국 오픈을 앞두고 이 권리를 특정 업체가 독점으로 따냈는데 이 사업에 노제호 총장이 관여돼 있었다고 합니다.
주최 측이 조인식에 박지성을 초대하려고 한 건 당연한 일이겠죠.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 중이던 박지성이 참석하면 모든 언론, 팬들이 관심을 보일 테니까요. 노 총장은 맨유 구단을 통해 축구협회에 박지성의 참가를 공식적으로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평소 자기관리에 철저하기로 유명한 박지성이 중요한 경기 전날, 그것도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가 있는 경기 파주에서 서울 강남까지 갈 리가 없었죠. 박지성은 그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노 총장은 “그럼 내가 알렉스 퍼거슨(76ㆍ당시 맨유 감독)에게 부탁해 퍼거슨이 박지성에게 직접 전화를 걸도록 해보겠다”고 하더라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축구협회 직원은 피식 웃었다고 합니다. ‘천하의 퍼거슨이 이런 일로 국가대표에 소집된 선수에게 전화를 한다고?’
하지만 얼마 뒤 정말로 축구협회 스태프와 박지성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박지성 휴대폰으로 퍼거슨 감독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두 사람의 통화가 끝난 뒤 입이 딱 벌어진 축구협회 직원들이 박지성에게 물었지요.
“지성아, 진짜 퍼거슨이야? 맞아?”
“네.”
“뭐래? 그 행사에 가래?”
“시간이 되면, 되도록이면 한 번 가라네요.”
“그럼 어떡하지? 가야 되는 거야?”
“아뇨. 갈 수 있으면 가라잖아요. 경기 전날 어떻게 가요. 저 안 가요.”
결국 박지성은 행사에 가지 않고 축하 동영상만 찍어 보냈습니다. 물론 맨유 구단과 사업적으로 뭔가 얽힌 게 있었으니 퍼거슨 감독도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전화를 했겠지요. 하지만 어찌됐든 퍼거슨까지 움직인 노 총장을 보고 축구협회 직원들은 “대단하다”며 수근 댔다고 합니다.
히딩크의 본심은…
한국이 러시아와 평가전을 치르기 하루 전인 10월 6일 ‘히딩크 특사’가 파견됐죠. 이용수 부회장과 전한진 팀장이 프랑스 칸으로 날아가 히딩크 감독을 직접 만난 겁니다.
이 부회장과 전 팀장은 당시 회동에서 히딩크 감독에게 “진짜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고 싶었느냐”라고 꼬치꼬치 묻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일단 히딩크 감독 역시 자기 사람(노 총장)이 관련된 일이라 말을 조심하는 게 느껴졌다”며 “우리도 지금에 와서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히딩크 감독의 정확한 현재 상황과 생각을 듣는 것이 중요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이런 말로 여운을 남겼습니다.
“히딩크가 감독이든 기술고문이든 어떤 포지션이든, 특히 감독자리에 관심이 있었다면 우리 둘 중 한 명에게는 무조건 먼저 연락했을 거다. 이번에 한 가지는 약속했다. 그 동안 너무 혼선이 많았으니 앞으로는 축구 특히 대표팀 관련 사항은 축구협회와 직접 상의해달라고 요청했고 히딩크 감독도 100% 동의했다.”
히딩크 감독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한 뭐가 진실인 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흐름을 쭉 살펴보면 대략 정리는 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하네요. 히딩크 감독이 진짜 한국 국가대표 사령탑을 맡아 내년 러시아 월드컵에 갈 의사가 있었던 걸로 보이시나요.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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