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원 소방서 이도재 소방관
현장 출동했다 사고로 한쪽 다리 잃어
“소방관 목숨은 생명 구하는데 써야”
절망 딛고 화재예방 업무로 제2인생
이도재(45) 소방관(경기 수원소방서 북부현장대응단)의 좌우명은 ‘힘찬 전진’이다. 소방관을 처음 시작한 2002년에 스스로 독려하는 의미로 이름 앞에 이 말을 붙였다. 176㎝, 78㎏의 당당한 체구에 해외 마라톤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체력이 강하고, 화재진압 현장에서 누구보다 앞장섰던 그였기에 선배, 동료들은 안성맞춤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는 왼쪽 다리를 잃고 휠체어에 의지해 다닌다.
10년 전인 2007년 7월이었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각, 경기 부천시의 일명 여우고개에서 2m 깊이의 맨홀에 빠진 고양이가 계속 울어대 인근 주택가 주민들이 잠을 잘 수 없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동료와 출동해 맨홀에서 고양이를 꺼내 차에 실으려 했던 것까지만 그는 기억한다. 음주운전 차량에 치인 것이었다. 깨어나니 엄청난 통증과 함께 다리를 잃은 것을 깨달았다. 절망감이 밀려왔다. “죽으려는 생각을 많이 했죠. 하지만 아내와 아들이 걱정 되고, 무엇보다 소방관 목숨은 다른 생명을 구하는 데에만 써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을 이렇게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저를 정신 차리게 했습니다. ‘화재 진압, 인명 구조, 응급 처치만 소방관의 임무는 아니지 않느냐, 두 손 멀쩡하고 컴퓨터도 다룰 수 있으니 뭐든 해 보자’ 다짐했죠.”
1년의 회복 시간을 가진 뒤 복귀한 이 소방관은 두 번째 소방관 인생을 시작했다. 10년 가까이 부천소방서, 수원소방서, 경기도재난안전본부 등에서 건축물 인허가 행정업무를 전문적으로 다뤘다. 새로 건축물을 짓거나 기존 건물을 증축 또는 용도변경할 때 설계, 착공, 완공의 단계 별로 소방 규정을 지켰는지를 점검하고 잘못된 부분을 고치도록 하는 역할이다. “인허가 중간 단계여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런데 제가 장애가 생기고 보니, 몸이 멀쩡했으면 안 보였을 것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아프니까 단점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웃음).”
건물 고층에 요양병원이나 척추를 다친 환자 입원실이 있는 병원이 들어선 경우라면 노인과 환자들의 대피 경로를 깐깐하게 따져봤다. 비상계단보다 미끄럼틀 형태의 통로를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휠체어가 드나드는 경사로 역시 설계 각도와 너비를 꼼꼼히 살폈다. 화재진압 경험을 살려 지하 2층 이하 주차장에는 성능이 좋은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도록 설득했다. “미국에서는 손해보험사들이 장애인이나 환자를 위한 대피 시설을 얼마나 잘 갖췄는지에 따라 보험금이나 보상금을 책정하기 때문에 건물주가 알아서 설비에 신경쓰는 반면 우리는 인허가 기준만 통과하면 되니까 가능하면 비용을 절감하는 쪽으로 해요. 당장 비용이 더 들더라도 큰 사고 났을 때를 대비하라고 건물주를 열심히 설득했죠. 고맙게도 많은 분들이 조언을 진심으로 받아줬습니다.”
이 일을 통해 이 소방관은 화재를 진압하는 것 못지 않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있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다리 하나 없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명감을 되새긴 그는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지난해 경기대 건설기술산업대학원(소방도시방재 전공)에서 ‘초고층 건축물 재난방지’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장 경험과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전국 곳곳으로 강의를 다녔다. “4년 동안 너무 열심히 했는지 지난해 다리에 염증이 생겼어요. 경기소방본부에서 치료 받을 시간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배려를 해줘서 수원소방서로 왔습니다. 물론 연구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힘찬 전진 2탄이죠.”
유망한 기타리스트, 소방관이 되다
현재 전국에서 활약 중인 소방관은 약 4만3,500명(올해 4월 기준)이다. 소방기본법 1조에는 소방관의 존재 이유를 ‘화재를 예방ㆍ경계하거나 진압하고 화재, 재난ㆍ재해, 그 밖의 위급한 상황에서의 구조ㆍ구급 활동 등을 통하여 국민의 생명ㆍ신체 및 재산을 보호함으로써 공공의 안녕 및 질서 유지와 복리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적고 있다. 법으로 규정한 업의 본질이 국민 생명 보호라는 헌신 자체다. 다른 공무원들과 달리 누릴 수 있는 권력은 극히 적으며,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일도 없지 않다. 불이 나고, 건물이 무너지고, 물이 흘러 넘쳐, 빠져 나오려 안간힘을 쓰는 그 위험천만한 곳으로 소방관들은 제 몸을 던진다. 이에 보람을 느끼고, 다른 기회를 버리면서까지 소방관이 되겠다는 이들이 있다.
올해 7월부터 영등포소방서에서 근무를 시작한 새내기 김보규(27) 소방관은 3년 전까지 ‘잘 나가는’ 기타리스트였다. 홍익대 앞 클럽 등에서 활동하던 어쿠스틱 팝 밴드 ‘빨간의자’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동아방송예술대에서 그를 가르친 기타리스트 황이현씨는 전도 유망한 제자의 돌연한 ‘변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 소방관이 기타리스트의 꿈을 버린 계기는 2014년 여름 우연히 목격한 사고였다. “시내 거리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쓰러지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저혈당 가능성이 커요. 당시에는 제가 의학지식이 없어서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당황해서 119 신고조차 못했죠. 저 자신에게 굴욕감이 느껴졌어요.” 다행히 환자는 출동한 119 구급대원의 응급조치를 받고 이송됐지만, 김 소방관의 마음 속에는 뭔가 남았다. “구급대원들이 굉장히 멋있어 보였어요. 새삼 소방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타도 분명 제게 소중하지만 의학지식이든, 소방지식이든, 법이든 뭐든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2
응급구조 맡은 김보규 소방관은
쓰러진 사람 아무것도 못해줬던 무력감에
잘나가던 기타리스트 접고 소방관 선택
아버지ㆍ3형제 모두 같은 길 걸어
사실 김 소방관은 어릴 적 꿈이 소방관이었다. 역시 소방관이었던 아버지(서울 강남소방서 김종곤 소방관)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열 한 살 때 기타를 들기 시작하면서 뮤지션의 길을 걸었다. “기타 실력이 금방 느는 거예요. 선생님들도 소질이 상당하다고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그러다 갑자기 기타를 그만치고 소방관을 하겠다고 하니 주변에서 놀라고, 저도 아쉬운 게 없다면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되찾은 것 같아 너무 설렜어요. 어렸을 때 제가 그렇게 좋아했던 소방관 아버지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지금 응급구조대원으로서 구급차를 운전하고 1급 구급대원 보조 역할을 하고 있는데,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절로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김 소방관의 아버지는 늘 “소방관은 덕을 쌓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 소방관의 합류로 3형제가 모두 덕을 쌓는 일에 투신하게 됐다. 김 소방관의 형 김태규(31ㆍ서울 강서소방서), 동생 김남규(23ㆍ서울소방본부) 소방관도 아버지 뒤를 잇고 있다. 자녀가 부모의 영향을 받아 같은 직업을 택하는 일은 흔하지만, 가장 위험하고 힘든 이 일조차 함께 하는 가족이 적지 않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소방청에 따르면, 가족 소방공무원은 6,543명으로 전체 소방공무원의 15%에 해당한다. 부부 소방관은 1,987쌍, 부모ㆍ자녀는 360가족, 형제자매는 1,135가족, 기타(4촌 이내) 834가족이다.
#3
세월호 시신 수습한 방경호 소방관
“제복의 힘이 구조만 생각나게 해”
소방관은 가장 이타적인 직업
가족 소방관이 전체의 15% 달해
위험도 막지 못하는 헌신의 전염성
마치 형제들이 모두 전쟁에 참전한 가족처럼 소방관 가족이라면 일상의 불안을 피할 수 없으련만 희생적인 핏줄이 따로 있기라도 한 것일까. 남편과 아들, 딸, 사위, 그리고 자신의 동생도 소방관인 민윤기(57)씨는 “3년 전 큰 화재 때 아이들 아빠, 딸, 아들, 사위까지 네 식구가 모두 같은 현장에 있었어요. 정말 걱정이 컸죠. 평소에도 현장에서 순직한 소방관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해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다칠지 모른다는 우려보다,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숭고함의 힘이 더 강력했다. 민씨의 딸 박미소(30ㆍ충남 천안 동남소방서) 소방관은 “누구보다 소방관 일에 자부심을 갖고 일하던 아버지를 보면서 헌신, 희생에 익숙해졌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자식들한테 대놓고 권하지는 않으셨지만 소방관을 하겠다니까 누구보다 반가워하셨어요. 지금도 선배로서 멘토 역할을 해 주시는 아버지가 고맙고 더 대단해 보여요.” 아버지 박찬형(56) 충남 부여소방서장은 “군이 무기를 들고 적과 싸워 국민을 지킨다면 소방관은 국민에게 직접 다가가 도움을 주는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사상 최악의 테러로 꼽히는 2001년 미국 9ㆍ11 테러 때 3,025명의 사망자 중 소방관 사망자는 343명에 달했다. 비행기의 돌진으로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져 내리기 직전 혼비백산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거슬러 건물로 뛰어들어간 소방관들이 고스란히 목숨을 잃었다. 눈 앞에 재난이 닥치면 소방관의 본능은 “생명을 구하라”고 명령한다. 실제로 생명을 구한 경험은 신성하다. 그렇게 해서 헌신의 본능은 전염성을 갖는다.
중앙119구조본부의 방경호(38) 소방관은 이를 “제복의 힘”이라고 일컬었다. “제복을 입고 출동 지시가 내려지는 순간 현장은 어떨까, 어떤 장비를 가져가야 할까, 어떻게 하면 빨리 문을 열고 사람을 데리고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화재진압 현장에 도끼랑 장갑 외에 두려움까지 갖고 들어가면 안 되죠. 물론 기둥 갈라지는 소리, 콘크리트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면 아찔합니다. 그래도 안에 사람이 있다고 하면 안 들어갈 수 없죠. 정말 위험한 상황이면 현장 지휘관이 통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일합니다.”
방 소방관이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250일 넘게 구조 및 시신 수습에 잠수부로 참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잠수매뉴얼에는 조류 속도가 시속 1.2노트(약 2.2㎞) 이상이면 잠수를 못하게 돼 있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고 그는 말한다. 당시 119 구조대, 민간잠수사를 막론하고 한 번이라도 더 물에 들어가려 애쓰다 민간잠수사가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방 소방관은 “세월호 사고 해역은 조류가 세서 시신을 안듯이 감싼 채 물 위로 올라가야 했어요. 물살을 받아 아이들의 시신이 제게 폭 안겼습니다. 그런데도 징그럽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제 아이가 중학생이었던 때라 제 아이 같기만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신이 불고 옷 색깔도 바래서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는데 신기하게 부모들은 바로 알아 봤습니다. 생명을 구하지 못했는데도 우리에게 와서 손 꼭 잡고 고맙다고 하던 희생자 부모들 얼굴을 보고는 제가 오히려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방 소방관이 이 직업을 택한 계기도 2005년 소방관의 도움을 받았던 경험이었다. “어느 날 새벽 아내가 갑자기 열이 치솟고 의식을 잃었어요. 놀라서 119에 신고를 했고 구급대원들이 재빨리 와서는 응급처치를 하고 걱정 말라고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아내가 괜찮아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돌아갔죠. 날이 밝은 뒤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서 소방서에 연락했는데, 대원들이 누구인지 알려주지는 않고 ‘원래 소방관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만 했습니다. 그 때 ‘아 이렇게 따뜻한 일이 있구나’ 느꼈어요. 저도 누군가를 구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충남 예산소방서의 염은호(37) 소방관도 직업 선택을 고민하던 20대에 소방관들의 도움을 받고는 소방관의 길을 택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부모님의 비닐하우스가 폭설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때 119 구조대가 와서는 구슬땀을 흘리면서 비닐하우스를 복구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자기 일도 아닌데 저렇게까지 할까 생각이 들었죠. 어렸을 때 부모님이 수확한 농작물을 나눠 먹으며 ‘사람은 베풀며 살아야 한다’고 하신 말씀을 새삼 실감했어요. 주저 없이 소방관이 되기로 했죠.”
그들이 있어 우리가 있다
권종륜 서울 강남소방서 소방관은 “길이 막혀 몇 분 늦게 도착해 심폐소생술을 하지 못하면 왜 더 빨리 가지 못했을까 자책하게 된다”고 했다. 서은석(57) 경기 양주소방서장은 이러한 소방관의 이타주의도 결국 훈련으로 키워지는 것이라고 했다. “대가 없이 누군가를 돕는 봉사는 아닙니다. 공무원으로서 봉급을 받으며 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현장에 가면 몸이 알아서 움직일 수 있도록, 머리로는 연구하고 몸으로는 훈련을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유전자(DNA)가 몸과 마음 속에 녹아 드는 것이죠.”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인간 사회에서 소방관은 가장 이타적인 직업이라 할 만하다. 극한의 위험에 빠졌을 때 구조의 손을 내밀 그들이 있기에 이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 그 기꺼운 헌신에 우리 모두는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수원ㆍ양주ㆍ오산ㆍ천안=박상준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박재현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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