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아버지의 한을 풀었구나!”
1999년 3월 경위로 진급하던 날, 비로소 하늘을 보고 웃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셨던 ‘금테’였다. 아버지는 ‘금테’를 두른 경찰모를 쓰지 못한 걸 늘 아쉬워했다. 당시에는 경위가 되어야 금테를 둘렀고, 이는 곧 간부 대우를 의미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꿈을 이뤄드릴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항상 “그놈의 금테!”라는 말을 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그 한을 내가 풀어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33년 만에 그 포부를 성취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형사 반장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은 지대했다.
아버지는 늘 “우리는 뼈대 있는 의인(義人) 집안”이라고 강조하셨다. 나는 상산 김씨의 후손이다. 우리 집안은 상주에서는 의로운 가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임진왜란 때 우리 가문에서 5부자가 의병으로 나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산속에 진지를 구축했는데, 불시에 왜군에 덮치는 바람에 모두 전사했다. 다행히 한분이 식량을 구하려 내려왔다가 목숨을 구했다. 그분이 우리 집안의 직계 조상이다.
아버지는 1913년에 태어났다. 나라가 어지럽던 시절이었다. 먹고 사는 것도 빠듯해 공부는 꿈도 못 꿨다. 아버지는 6형제 중 3째였다. 장남이 아니었기에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학교에 입학했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를 하며 꿈을 키워나갔다. 나라가 해방되던 해, 집안에 겹경사가 났다. 아버지가 경찰에 입문하신 것이다. 부모님마저 농사나 지으라며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 밤마다 켜져 있던 촛불이 해가 뜰 때가지 꺼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경찰 집안에 ‘가축 농장’이 들어선 이유
아버지는 슬하에 7남매를 두셨다. 그중에서 나는 여섯째이자 아들로서는 막내였다. 아버지는 늘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로 바쁘셨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버지의 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우리가 잠든 사이 출근을 하신 거였다. 으레 초저녁에 집에 잠깐 들러 저녁만 드시고 다시 나갔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아버지의 도시락을 챙긴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형사계 의자에 앉아 꾸벅 꾸벅 졸고 계셨다. 아버지가 깨실까 조심스레 문을 열었지만, 조그마한 인기척에도 금방 눈을 뜨셨다. 그리고 나를 발견하곤 미소를 지어주셨다. 닳아빠진 가죽 점퍼를 입고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세상에서 제일 멋있던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는 항상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울타리가 돼 주셨다.
당시 경찰은 박봉이었다. 집에서 돼지와 염소 등 돈 되는 가축을 많이 키운 것도 모두 얇은 월급봉투를 벌충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우리 집은 7남매였다. 부모님이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다.
집안은 힘들었지만 자식들에겐 늘 좋은 것만 해주려고 애쓰셨다. 아버지가 구멍 난 양말을 신으실 때, 나는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워커 신발을 신고 다녔다. 고생하신 모습을 생각하면 늘 코끝이 찡해진다.
“꼭 선배님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경찰에 몸담으셨지만 처음엔 경찰이 되기 싫었다. 너무 힘들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첫 직장은 초등학교 교사였다. 발령지는 고향인 상주시 외서면 갈곡리였다. 첩첩 산중 분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전교생 51명에 교사는 3명뿐이었다. 편한 길을 택했지만 막상 교사 생활을 해보니 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했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교사 생활을 하던 중 시험을 치고 경찰관이 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경찰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렇게 파출소에서 2년을 근무하고 바로 형사 생활을 시작했다.
나의 형사 생활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다. 언젠가 ‘대구 형사계의 전설’이라는 말도 들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구에 터진 대형 사건은 모두 내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위에서 나를 찾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부산 송도 토막 살해 사건’이다. 이 사건은 피해자가 죽은 지 6년이 넘도록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난리 난 사건이었다. 언론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토막살인 사건이라고 보도했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빨리 검거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물꼬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어느 날 절도범을 하나 잡아들였다. 경찰서로 연행하자 “큰 거 한 건 줄 테니, 봐 주세요”면서 ‘거래’를 시도했다. 전과가 있어서 그렇지 그렇게 값비싼 물건을 훔친 것도 아니어서 일단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제 동서가 술에 취해서 사람을 죽였다고 했어요. 끔찍하게 죽여서 부산에 버렸대요. 제가 그 이야길 분명히 들었어요.”
귀가 번쩍 뜨였다. 절도범의 제보를 바탕으로 1985년 9월 23일 대구 평리동에서 범인을 검거했다. 그는 경찰서에 와서도 완강하게 범행을 부인했다. 우리는 그의 시신을 보관하고 있던 부산 당감동으로 데려갔다. 그는 시신을 보더니 공손하게 절을 두 번 한 후에 “미안하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6년 7개월 만에 사건이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그 사건으로 나는 경장으로 특진을 하게 되었다. 경찰에 들어온 지 3년 4개월 만이었다. 당시 순경으로 퇴직하던 선배들이 나를 진심으로 부러워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경찰은 내 체질, 승진에 승진 거듭
경장을 달고 5년 뒤 다시 기회가 왔다. 화물차 절도 사건이 발생했다. 도둑들이 화물차를 통째로 훔쳐가 화물은 장물로 처리하고 차는 분해해서 부속품 시장이 내다 판 사건이었다. 화물차로 생계를 꾸리던 이들에게는 말 그대로 날벼락이었다. 수사 진행이 쉽지 않았다. 폐쇄회로TV(CCTV)도 없었던 때라 무작정 차를 몰고 달아나버리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정보원들의 제보와 피해품의 유통경로를 추적하면서 전국을 누볐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국토대장정을 한 끝에 범인 세 명을 잡았다.
경사 진급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런데 선배 형사가 나에게 “양보하라”고 했다. 물러설 수 없었다. 결국 “누가 일을 더 많이 했는지 동료들에게 물어보자”고 했다. 형사반장들이 투표를 진행했다. 결과는 4:3. 내가 이겼다. 형사반장들이 나의 능력을 인정해준 것이었다. 나는 다시 경사로 특진했다.
그 뒤로 91년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과 지하철 방화사건, 비산동 거성관 방화사건, 삼덕동 권총 강도 사건 등에 투입되기도 했다. 그러다 92년 1월 20일 형사기동대 반장으로 부임했다. 순경 출신이 두 번씩이나 특진해 반장으로 부임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너구리’ 잡으러 갔다가 놓친 사연
폭력계에 와서 배운 게 많았다. 이 바닥의 생리를 체득했다고나 할까. 폭력배들이 어깨에 힘을 주는 이유가 일반인들과 조금 달랐다. 이들은 자기 조직의 이름이 생기고 전과가 붙으면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OO파’라는 이름이 중요했다. ‘파’라는 명칭은 경찰이 지었다. 관리 차원에서 이름을 붙였는데, 이름이 생기면 경찰이 주목할 만한 규모와 세력으로 컸다고 뿌듯해하는 눈치였다. 동네 이름을 따거나 두목의 별명으로 내가 지어준 이름이 아마 다섯 개 정도는 될 것이다.
웃지 못 할 일도 많았다. 한번은 조폭 조직원 상갓집에 가서 밥을 먹다가 푸념 비슷하게 “너구리란 놈을 빨리 찾아야 하는데, 이 자슥이 요새 어디 처박혀 있는 기고?”하는데 앞에 앉아서 밥을 먹던 친구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의 이름은 알았지만 별명은 몰랐는데, 알고 보니 그가 ‘너구리’였다.
아찔한 순간도 많았다. 시내 모 조직에서 꽤 높은 자리에 있던 친구를 검거할 때였다. 그는 형사 앞에서도 어깨에 힘을 빼지 않았다. 욱하는 성질에 조금 거칠게 다루다가 인대가 나가버렸다. 조폭들이 의기투합해서 나를 손보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선배 형사들이 “선희 건드리면 조직 자체를 와해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내가 위협을 느끼고 아이들과 같이 처가에 2박3일 동안 피신을 했다고 한다. 나는 한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했던 까닭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까맣게 몰랐다.
“형사가 왜 8시에 퇴근하는가?”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현장에서 뛰느라 가정을 소홀히 했다. 지금도 성인이 된 아이들에게 늘 미안하다. 가정과 일이 양립할 수 없단 말이 있는데, 형사는 더더욱 그렇다. 일 년에 5일 이상 휴가를 쓴 적이 없다. 범죄는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일이고 휴가를 내서 놀러 가도 범죄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사시사철, 24시 긴장해야 하는 직업이다.
가정생활에서는 어르신들 덕을 많이 봤다. 내 아버지가 평생 경찰로 근무하셨듯이 장인어른도 영주에서 형사반장을 하셨다. 경찰 집안끼리 맺어진 경우다. 한번은 저녁 8시 즈음에 퇴근해서 집에 들어갔더니 장모님이 와 계셨다. 장모님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시면서 말했다.
평생 경찰 남편과 함께 사신 탓에 오후 8시 퇴근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신 거였다.
아내도 그 누구보다 나를 이해해줬다. 경찰에서 나름의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의 이해와 배려 덕분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버지와 장인어른 모두 최고의 애국자들이다. 쉬운 길에 곁눈 팔지 않고 공동체를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신이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셨다. 두 분만 그럴까. 나는 형사가 가장 헌신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서 자신을 희생해 국민의 삶을 보호하는 수호자들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신 집안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국가에 대한 헌신도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내력이란 생각이 든다. 아버지도 나도 같은 피를 물려받았다. 내가 끝내 교사를 그만두고, 경찰로 이직한 것도 면면히 내려오는 혈통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헤집으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후배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땀 흘려 수고하면서 쌓은 선배들의 전통과 경찰로서의 사명감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대들의 수고와 노력을 사람들은 다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하늘과 땅은 반드시 알 것이다. 나는 그렇게 굳게 믿는다.
<김선희 대구성서경찰서 형사과장의 구술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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