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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칼럼] 개식용 찬반 논란이 계속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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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칼럼] 개식용 찬반 논란이 계속되는 이유

입력
2017.10.1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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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육견협회 회원들이 지난달 22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에서 개고기 합법화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육견협회 회원들이 지난달 22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에서 개고기 합법화 집회에 참가하고 있다. 연합뉴스

‘개고기를 먹어도 되는 가’는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논쟁거리 중 하나이다. 개고기 논쟁은 예전에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수준, 시쳇말로 ‘떡밥’ 수준이었는데, 요즘은 조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개고기를 판매하는 업자들(이들을 ‘육견인’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이 집회를 열고 어느 때보다 합법화의 목소리를 높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한 국회의원이 개고기 식용 금지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하고 있다. 현재 개는 축산물위생관리법에서 빠져 있어 합법적인 도축을 할 수 없기에 비위생적으로 도축되고 유통되고 있는 실정이고 그 점 때문에 개고기는 더 비난을 받고 있다.

원숭이, 고래, 개를 먹는 것은 취향의 문제다. 그런데 취향은 다른 존재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을 때 존중 받을 수 있다. 사진은 지난 7월 영국배우 루시아 바버가 광화문 광장에서 개식용 반대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원숭이, 고래, 개를 먹는 것은 취향의 문제다. 그런데 취향은 다른 존재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을 때 존중 받을 수 있다. 사진은 지난 7월 영국배우 루시아 바버가 광화문 광장에서 개식용 반대 1인 시위를 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개고기를 찬성하는 가장 흔한 근거는 ‘왜 입맛의 문제에 관여하느냐’는 것이다. 원숭이 골을 먹는 민족도 있고 고래 고기를 먹는 민족도 있고 거위 간을 먹는 민족도 있는데 왜 개고기를 먹는 우리만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칼럼에서 여러 번 강조했지만 취향은 다른 존재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을 때 존중을 받을 수 있다. 사람 고기를 먹는 사람이 왜 남의 취향에 간섭하느냐고 했을 때 선뜻 동의하기 어려움을 생각하면 취향 근거의 빈약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 고기와 개고기가 똑같으냐고 반론을 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사람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야 하므로 단순히 취향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문제는 개고기를 먹기 위해서도 개에게 사육 과정이든 도살 과정이든 피해를 주어야 하는데 아무리 취향이라고 해도 그게 용납이 되느냐는 것이다. 요는 사람에게는 그러면 안 되는데 개에게는 그래도 되는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찬성의 근거로 개고기를 먹는 것이 우리의 오랜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거론할 가치도 없다. 노비 제도나 고려장도 우리의 오랜 전통이지만 그런 ‘유구한 전통’을 기리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오랜 전통인지 여부는 그것이 윤리적이라는 것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과연 친하다는 것이 먹으면 안 되는 근거가 될까. 친하면 먹으면 안 된다는 것도 정서에 근거한 것 아닌가. 게티이미지뱅크
과연 친하다는 것이 먹으면 안 되는 근거가 될까. 친하면 먹으면 안 된다는 것도 정서에 근거한 것 아닌가. 게티이미지뱅크

개고기를 찬성하는 쪽의 근거가 이렇게 약하니 개고기는 먹어서는 안 되는 걸까? 솔직히 말해 개고기를 반대하는 쪽의 근거도 그렇게 강하지 않다. 개고기를 반대하는 가장 흔한 근거는 개는 우리와 친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친한 정도를 넘어 ‘반려’ 동물이라고 불릴 정도인 개를 먹는 것은 야만적이라는 논거이다. 이 근거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검토해 봐야 한다. 첫째는 우리가 정말로 개와 친한 동물인가 하는 ‘팩트 체크’를 해야 한다. 서구 국가들에서는 오래 전부터 개가 반려 동물이었고 우리도 애견인이 굉장히 많이 늘어나고 있지만 개와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그리고 중동 지방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개와 친하지 않은 민족도 꽤 있다. 개와 친한 사람은 먹으면 안 되고 개와 친하지 않은 사람은 먹어도 된다고 하면 쉬운 해결책인데, 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쪽이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는 개와 인간이 친하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할 때 과연 친하다는 것이 먹으면 안 되는 근거가 되느냐는 것이다. 영화로도 개봉될 예정인 일본 소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7)에는 누군가를 먹으면 먹힌 사람의 영혼이 먹은 사람 안에서 계속 산다는 신앙이 나온다. 친하다는 것이 오히려 먹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합리적인 근거가 아니라 신앙일 뿐이다. 그러나 친하면 먹으면 안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합리적 근거가 아니라 정서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친한 대상이므로 기르는 과정이나 죽이는 과정에서 고통과 공포를 주면 안 되겠지만 그것이 없다면 정서는 적응함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문제이다.

소나 돼지와 실제로 친한 사람도 많다. ‘워낭소리’(2008) 같은 영화를 보면 소 주인은 소를 가족처럼 대한다. 그렇게 키워도 소 주인은 소를 식용으로 팔고 소고기도 먹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소나 돼지와 실제로 친한 사람도 많다. ‘워낭소리’(2008) 같은 영화를 보면 소 주인은 소를 가족처럼 대한다. 그렇게 키워도 소 주인은 소를 식용으로 팔고 소고기도 먹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소나 돼지는 먹으면서 개는 먹으면 안 되느냐는 논리가 여기서 다시 등장한다. 소나 돼지와 실제로 친한 사람이 많다. ‘워낭소리’(2008) 같은 영화를 보면 소 주인은 소를 가족처럼 대한다. 그렇게 키워도 소 주인은 소를 식용으로 팔고 소고기도 먹는다. 나는 이 칼럼에서 소나 돼지를 고통 없이 기르고, 죽일 수 있다는 조건에서 먹는 것이 용인될 수 있다고 여러 번 말했다. 개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개의 본성에 맞게 고통 없이 기르고, 죽일 수 있다면 먹는 게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개고기를 먹는 것이 여전히 윤리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다음 칼럼에서 그 이유를 풀어 보겠다.

최훈 강원대 교수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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