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단체 지원 점검… 조용히 처리”
블랙ㆍ화이트리스트 관련 광범위 지시
박근혜 정부 당시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이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에게 “종북 생태계 척결방안을 추진하라”거나 “문화관련 단체 지원을 면밀히 스크린 할 것” 등을 지시하며 문화계 탄압을 진두지휘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전 실장은 검찰 조사에서 문화ㆍ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의혹을 부인했지만 본인이 주재한 청와대 회의에서 블랙ㆍ화이트리스트 관련 지시를 광범위하게 내렸던 정황이 문건을 통해 확인됐다.
한국일보가 12일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이른바 ‘청와대 캐비닛 문건’ 중 2015~2016년 ‘대통령 비서실장 지시사항 이행 및 대책(안)’ 발췌본에는 이 전 실장이 문화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는 방안을 직간접적으로 지시하고, 정권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보수 문화 단체를 활용하거나 지원을 당부한 사실이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다. 이 의원은 문재인 정부가 청와대 캐비닛에서 발견한 뒤 국가기록원으로 넘긴 자료를 열람한 뒤 발체본을 만들었다.
“종북 생태계 척결” “조용히 진행”
2015년 3월 9일 당시 이 실장은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종북 생태계 척결 방안을 수립해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지시 사항에는 협동조합 등 정부 보조와 지원급 차단책, 산하단체 취업 근절, 정부 위원회와 공공기관임원ㆍ심사위원 배제 등 구체적인 방안이 포함됐다.
약 2주 뒤인 25일 이 실장은 당시 우병우 민정수석, 조윤선 정무수석, 김상률 교문수석을 지목해 지시를 내렸다. 그는 “민간단체에 많은 정부 보조금이 지원되고 있는데, 상당부분이 종북 좌파세력에 의해 점유되고 있다”면서 “현 상황이 어떠하고 어떻게 되고 있는지, 특히 문화관련 단체 지원에 대해 면밀히 스크린 해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외적으로 불필요한 논란이 없도록 로우키(low-key)로 차분히 진행하라”는 단서를 덧붙였다. 이목을 끌지 않게 낮은 자세로 추진하라는 의미로, 문화계 탄압 사실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은밀한 조사를 당부한 것이다.
이 실장은 이틀 뒤 회의에서는 ‘복지부 산하 보건복지인력개발원’을 콕 집어 언급했다. 그는 “2013년부터 인력개발원에서 운영하고 있는 ‘사회복지핵심리더 아카데미’의 강사진에 시위 주도자, 국보법 위바 전력자 등 이념 편향 인사가 적지 않다”면서 “운영 실태를 점검한 후 보고하라”고 최원영 당시 고용복지 수석에게 지시했다.
이후 회의에서도 문화단체 재정 지원을 점검하라는 노골적인 지시를 반복적으로 내렸다. 이 실장은 “각 부처가 재정을 지원해주고 있는 민간단체를 대상으로 지원 범위를 점검하라”고 지시(2015년 5월 15일)하는가 하면 추가경정예산을 앞두고는 “문체부 소관 예산으로 예술계 비판단체를 지원하는 사례가 있다고 하는데 단체의 활동내용과 성향을 분석한 후 지원여부를 결정하라”고 강조했다.
“‘뮤지컬 꽃신’ 지원” “‘불안한 외출’은 적절한 조치”
문건에서는 이 전 실장이 정권에 우호적인 보수단체는 선별해 지원하는 이른바 ‘화이트리스트’에 개입한 정황도 포착됐다. 2015년 3월 18일 당시 이 실장은 교문수석에게 “뮤지컬 꽃신이라는 단체가 파독광부, 파독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독일 아리랑’(가칭) 제작을 추진하고 있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이를 ‘건전 뮤지컬’이라고 추켜세웠다. 이어 “영화 ‘국제시장’과 같은 건전뮤지컬로 육성할 필요가 있는지 살펴보고 법 테두리 내에서 방안이 있는지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정권에 반하는 단체에는 가혹했다. 이 실장은 2015년 7월 15일 국가보안법 폐지를 다룬 영화 ‘불안한 외출’에 대해 “영화가 국립 충남대와 수원시립박물관 등 공공기관에서 상영 중이라고 하는데 이는 문제가 심각하다”면서 “교육부와 문체부는 사실관계를 확인해보고 필요한 경우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며 사실상 배제 지시를 내렸다.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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