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환씨 등 3명 재심서 무죄
연평도서 고기 잡다가 납북
귀환 후 고문으로 허위 자백
국가 상대 보상ㆍ배상 소송키로
“세월이 허망하고 나이 먹은 게 억울하다. 먹고 살려고 배를 탔을 뿐인데 간첩이라니….” 1968년 5월 서해 연평도 해역에서 조기잡이 도중 강제 납북됐다가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과 억울한 옥살이에 시달렸던 ‘영창호’ 선원 박춘환(71)씨 등 납북어부 3명이 사건 발생 49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전주지법 형사1부(부장 장찬)는 최근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각각 징역 1년6개월과 8개월을 선고 받고 복역한 박춘환씨 등 납북어부 3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수사단계에서 불법구금과 고문 등 가혹 행위로 만들어진 것인 만큼 증거능력이나 신빙성이 없다”고 밝혔다. 박씨를 제외한 선장 오경태씨, 선원 허태근씨는 이미 숨져 가족이 대신 법정에 섰다.
전북 군산시 옥도면 개야도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부로 생활하던 박씨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가족을 부양하려고 열다섯 살부터 뱃일을 했고, 사건 당시에도 만선을 기대하며 배에 올랐다. 그는 1968년 5월 오씨ㆍ허씨와 함께 연평도 근해에서 조기잡이를 하다 북한 경비정에 납치돼 4개월간 억류됐다가 귀환했다.
그러나 경찰의 모진 고문 끝에 북한을 고무ㆍ찬양하고 국가기밀을 탐지ㆍ수집하는 간첩 활동을 했다는 허위자백으로 1972년 기소돼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 받고 만기 출소했다. 이 사건은 2011년 3월 재심을 통해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당시 그는 경찰서에 끌려가 잠 안 재우기, 통닭구이, 고춧가루 코에 붓기, 물ㆍ전기 고문 등을 견디지 못해 동갑내기 친구를 간첩으로 포섭하려했다는 허위 진술도 했다. 이후 친구는 불고지죄로 8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박씨는 간첩이란 멍에를 썼고 빨갱이란 냉대와 경찰의 감시로 고향에서 살 수 없었다. 친구의 얼굴을 볼 낯도 없었고 집안은 쑥대밭이 됐다. 그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고향을 등지고 연고가 없는 충청도에서 수십 년을 숨어 지내왔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엉덩이뼈와 어깨뼈가 모두 부러졌고 제대로 걸을 수 없었지만 일용직, 공장 야간경비 등 각종 궂은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왔다. 지금도 그는 건강이 좋지 못하다. 그가 누명을 벗고 완전한 자유인이 되기까지 반백 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 사이 그를 고문하고 간첩으로 몰았던 경찰관 10여명은 모두 세상을 등졌다.
박씨는 “완전히 무죄를 선고 받았으나 이렇게 나이가 먹은 게 억울하다. 이게 사람 손이냐”면서 “정부가 너무 야속하고 상처가 너무 커 다시는 고향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영창호 선장이었던 오경태 씨의 딸 정애(52)씨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고문 후유증으로 많이 아파하셨다. 항상 누워 계셨던 기억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영창호 납북어부들의 재심을 맡은 이명춘 변호사는 “1967년에서 70년 초반까지 처벌받은 납북어부만 1,500여명에 달하지만 지금까지 무죄를 받은 사람은 채 10명이 안 된다”며 “아직 갈 길이 멀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국가를 상대로 형사보상과 배상을 진행할 계획이다.
전주=하태민 기자 ham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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